◎ 참석자
· 이병우 감독 (기감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장, 충북연회)
· 유영완 감독 (충청연회)
· 권오서 목사 (춘천중앙교회)
· 김진홍 목사 (수표교교회)
· 이용윤 목사 (기감 선교국 총무 직무대리)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교계와 시민단체들이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는 일찌감치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기감은 그 일환으로 국민일보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신석구 목사 평전 글쓰기 대회’를 진행한다. 이를 통해 자라나는 세대에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인의 숭고한 정신을 알릴 계획이다.
1875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신 목사는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엔 공산주의에 반대해 평양에서 만들어진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을 지냈다는 이유로 체포돼 인민군에 총살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대회에는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가 집필한 신 목사의 평전 ‘출이독립(出以獨立)’(신앙과지성사)을 읽은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다. 응모 원고는 이메일(kmchistory@hanmail.net)과 우편(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49 감리회관 16층 선교국)으로 다음 달 30일까지 제출하면 된다.
기감 총회는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수표교교회에서 ‘신석구 목사 평전 글쓰기 대회와 신앙선배들의 나라사랑’을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이병우(기감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장) 충북연회 감독, 유영완(천안 하늘중앙교회) 충청연회 감독, 권오서(춘천중앙교회) 김진홍(수표교교회) 이용윤(기감 선교국 총무 직무대리) 목사가 참석했다. 좌담회는 이 감독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병우 감독=신석구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일생 독립에 헌신했던 분이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나.
△유영완 감독=현재 시무하는 천안 하늘중앙교회의 전신인 천안읍교회의 8대 담임목사가 바로 신 목사였다. 1935년부터 39년까지 사역하셨다. 교인들의 자긍심이 크다. 권력 앞에 당당했던 분이셨다. 굴복한 일이 없었다. 스스로는 청빈했고 늘 나누는 삶을 사셨다. 유치원도 열고 4년제 소학교도 세워 가난한 이들을 교육했다. 존경받던 목회자였다.
△권오서 목사=현 춘천중앙교회의 모태인 춘천읍교회에서도 1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하셨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독립운동이 신앙적인 일이라는 기도 응답을 받은 후 온몸을 던져 독립에 뛰어들었던 분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안타깝다. 이제라도 신 목사의 아름다운 삶이 알려지길 바란다.
△김진홍 목사=1918년 수표교교회에 부임하신 신 목사는 1919년 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뒤 투옥되셨다. 그의 독립운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 신앙인의 실천이었다. 신앙 양심에 따라 독립운동을 시작한 신 목사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담대히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다. 일제 강점기 때 여러 교회를 전전했다. 일제에 굴종하던 교단 지도부에 눈엣가시였다는 증거다. 가난한 교인들이 대접할 게 없어 심방을 꺼리자 “밥을 먹지 않겠다”며 생쌀만 드시기도 했다. 독립을 향한 염원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만 가지고 계셨던 분이셨다.
△이 감독=신 목사 자서전 글짓기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 대회가 3·1운동 100주년을 한 해 앞둔 올해 우리 사회에 어떤 교훈을 준다고 보나.
△이용윤 목사=신 목사는 수차례 투옥과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다. 광복 후 많은 목회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할 때 그는 성도들과 함께하기 위해 북에 남았고 결국 순교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건 그가 순교한 사실이 후배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혔다는 점이다. 교단 실무자로서 다음세대에 이처럼 영향력이 큰 분을 잘 알려서 신앙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싶다. 기감 소속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한 뒤 유튜브로 알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권 목사=사회에 주는 교훈과 함께 후배 목사들에게도 교훈이 크다고 하겠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독립을 위한 도구로 여겼던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신 목사는 독립운동을 할수록 신앙의 깊은 경지로 빠져들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신앙 차원에서 독립에 투신했다. 이 시대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더 크다고 본다.
△유 감독=신 목사가 우리 교회에 부임할 때 이미 환갑이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노년이었다. 하지만 천안 일대 청년들은 민족대표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줄지어 몰려들었다. 당시 신 목사가 새벽기도 중 “나이가 들었다고 청년들을 네 자식처럼 사랑하지 않아서 되겠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일이 있었다. 신 목사는 그 즉시 청년 목회를 게을리한 것을 후회하고 청년들에게 사과까지 했다고 한다. 나이 들었다고 대접받으려 하지 않고 사과하는 모습은 지금 이 시대에 큰 귀감이 된다.
△이 감독=맞다. 그는 신념이 확고한 분이셨다. 공산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한 근본 이유는 모두 신앙과 배치됐기 때문이었다. 평전 제목인 ‘출이독립’만 봐도 그렇다. 이 말은 3·1운동 직후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때 검사가 ‘출소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느냐’고 거듭 묻자 ‘그렇다’고 답했던 걸 의미한다. 민족대표 중 변절했다고 의심받은 분도 있지만 신 목사는 전혀 의심받지 않았다.
△김 목사=민족대표 중 신 목사를 포함해 모두 세 명이 수표교교회 출신이다. 신 목사는 특히 순결한 분이었다.
△이 감독=결국 이런 분의 삶과 신앙을 우리 시대에 다시 조명하는 일이 후배들의 책임이라고 본다.
△김 목사=“교인들을 두고 월남할 수 없다”고 했던 신 목사는 결국 공산정권에 의해 평양교화소(교도소)에 갇힌다. 그러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9·28서울수복 이후 도망가던 인민군 잔당들에 의해 총살당한 뒤 우물에 버려졌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묘는 가묘(假墓)다. 시신을 수습하는 게 어렵다면 그분의 정신이라도 온전히 수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 감독=요즘 젊은이들은 민족관이나 국가관이 희미해지고 있다.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청빈의 삶은 흔적을 감춘 지 오래다. 윤리적 문제들도 양산되고 있다. 이 시점에 신 목사의 삶은 나침반과도 같다. 우리가 갈 길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신앙의 선배를 우상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살았던 삶을 그대로 살피고 본받고 우리도 변하자는 제안이다.
△이 감독=귀한 말씀 주셨다. 올곧은 삶을 살았던 신앙 선배를 기억하고 알리는 일에 모두 힘을 합치자. 글쓰기 대회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 목사의 평전인 ‘출이독립’은 신앙인들이라면 꼭 읽어볼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대회▷ ‘출이독립’ 읽고 내달 30일까지 온라인(kmchistory@hanmail.net)·우편(선교국)제출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좌담회] “하나님 뜻 따라 실천한 독립운동·순교 묻혀… 재조명은 신앙 후배들 책임”
입력 2018-08-0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