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종전선언은 시대 흐름… 대북 제재도 새로 고려”

입력 2018-08-03 04:04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 중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일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왼쪽 사진). 강 장관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도 양자회담을 했다(가운데). ARF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 수행원인 강명철이 숙소인 싱가포르의 한 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2일 “종전선언은 시대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비핵화 진전에 따라 대북 제재도 당연히 새로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외교수장이 북·미 간 입장차가 첨예하게 갈리는 종전선언과 대북제재 문제를 놓고 북한 입장을 확실하게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왕 부장의 발언은 시기와 장소 모두 의미가 적지 않다는 평가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 차 싱가포르를 방문 중인 왕 부장은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언론 브리핑을 열어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반복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한반도 양측의 열망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왕 부장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선을 그은 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법적 프로세스가 필요하고 당사국의 서명과 확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종전선언에는 다소 유연성을 두면서 평화협정 체결 과정엔 반드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왕 부장은 미국의 대중국 압박과 한반도 이슈 전반에 대한 입장을 묻자 “우리는 원칙을 딜(거래)하지 않는다”며 “비핵화와 평화 메커니즘을 만드는 일 모두가 중요하다”고 했다. ARF는 아세안과 남·북·미·중·러 등 27개국 외교수장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이자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다자안보협의체다. 이용호 외무상은 3일 오전 싱가포르에 도착한다. 도착 직후 중국, 러시아 및 아세안 일부 국가들과 연쇄 회담할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당초 이날 오후 왕 부장과 회담하기로 돼 있었지만 중국 측 요구로 하루 미뤄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중국의 회담 일정이 길어졌고 우리도 일정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회담 직전 연기 통보는 외교적 결례이자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베테랑 외교관인 왕 부장은 지난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ARF 땐 한·중 회담 내내 굳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사드 배치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었다.

미국은 이번 ARF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결의 준수 의지를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벼르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도 3일 싱가포르에 도착해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세안 국가들과 양자회담을 갖고 이런 입장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서울 중구 정동 미 대사관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종전선언과 관련 “북한이 비핵화를 향해 상당한 움직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압박했다.

강 장관은 이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각각 회담했다. 한·러,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선 북한산 석탄의 한국 반입 문제가 동시에 거론됐다. 라브로프 장관은 미국이 북한산 석탄 환적 이슈에 관심이 많다고 먼저 얘기를 꺼냈고 이에 강 장관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원국으로서 제재 이행 의무가 있기 때문에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노 외무상 역시 선박을 통한 불법 환적 문제를 언급하며 “안보리 제재를 확실히 이행하기 위해 한·미·일이 특별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 장관은 이날 공개된 현지 언론 스트레이츠타임스 인터뷰에서 “비핵화 약속이 실질적 행동으로 구체화될 때까지 제재가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