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국회·언론에도 ‘상고법원 로비’

입력 2018-07-31 18:11 수정 2018-08-01 17:30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 거래·법관사찰 의혹’ 관련 196개 파일의 원문이 공개된 3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최종학 선임기자
사진은 ‘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대(對)국회 전략’ ‘상고법원 관련 법사위 논의 프레임 변경 추진 검토’ 등 이날 공개된 문건들. 서영희 기자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전방위적 로비를 시도한 정황이 담긴 문건들이 30일 공개됐다. 상고법원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국민을 ‘이기적인 존재’라고 표현한 문건도 발견됐다. 행정처는 국회와 언론, 법무부까지 주요 설득 대상으로 삼고 각종 전략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행정처는 이날 ‘양승태 행정처의 재판거래·법관사찰 의혹’ 관련 196개 파일(228개 가운데 중복된 32개 제외)의 원문을 법원 내부 전산망과 언론에 공개했다. 앞서 지난달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98건을 제외한 나머지다.

공개된 문건 중 국민을 ‘이기적인 존재’라 표현한 부분이 등장했다. 2014년 8월 작성된 ‘청와대 법무비서관실과의 회식 관련’ 문건에서다. 문건은 먼저 청와대 내에서 상고법원이 이슈화되지 않는 이유로 ‘국민들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이어 대법관의 업무 강도가 높아 상고법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는 ‘이성적인’ 법조인들에게나 통한다고 썼다. ‘일반 국민들은 대법관이 높은 보수와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만큼 그 정도 업무는 과한 것이 아니며, 특히 내 사건은 대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다’고 덧붙였다. 설득 전략으로는 ‘이기적인 국민 입장에서 상고법원이 어떤 장점이 있는지 접근’ 등을 제시했다.

행정처는 대(對)국회 설득에도 공을 들였다. 이날 공개된 문건들에는 소속 의원들의 찬반 입장을 파악하고 의원별 맞춤형 관심사항을 분석한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언론도 상고법원의 중요성을 홍보할 수 있는 창구였다. 행정처는 주요 언론사 간부를 접촉하거나 유력 일간지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구상을 내놨다. 줄곧 상고법원을 반대하던 법무부를 설득하기 위한 문건도 다수 생산됐다. 행정처는 ‘영장 없는 체포’를 활성화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상고법원 거래 카드로 쓰려 한 셈이다. 법무부를 설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최후의 충격요법’ ‘죽음의 역공’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협상’ 등 자극적인 수사도 사용했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뒤 박근혜 전 대통령 하야 정국에 대비한 정황도 드러났다. ‘대외비 문건(대통령 하야 정국이 사법부에 미칠 영향)’에 대법원 전략이 나타나 있다. ‘대북 문제를 제외한 정치적 기본권, 정치적 자유와 관련된 이슈에서는 과감하게 진보적 판단을 내놓아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한다.

당시 사법부는 인사적체 해소와 대법원 영향력 강화를 위해 상고법원 설치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 최종 결정권자인 청와대도 미온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행정처가 출구를 찾기 위해 다각도로 접근한 정황이 문건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행정처 문건 공개로 향후 검찰 수사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행정처가 부적절한 시도를 하려 한 정황이 문건을 통해 드러나면서 진상규명 여론도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자료제출 거부 등 행정처의 비협조적 태도에 불만을 표하고 있다. 앞서 법원은 임종헌 전 차장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제외하고 관계자들의 영장을 잇따라 기각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