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고령화로 노동력 감소 심각… 여성·노인·비정규직 활용 불가피
노동생산성 美의 60% 수준, G7 꼴찌… 2015년 덴쓰 신입직원 과로 자살 논란
초과근무 상한 위반 기업 처벌 도입, 정규직-비정규직 임금 차별도 금지
아베 “과로사 막고 생산성 높일 것” 노동자보다 기업에 친화적 비판도
최근 한국에선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환경의 변화가 커다란 사회적 이슈다. 이웃나라 일본도 이런 노동환경 변화를 놓고 오랜 기간 진통을 겪다 지난 6월 29일 의회에서 ‘일하는 방식 개혁’ 관련 법안(노동 관련 8개 법률안 개정)을 통과시켰다. 초과근무 상한제,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탈시간급 제도)를 골자로 하는 일본의 ‘일하는 방식 개혁’은 과로사회의 상징이던 일본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개혁 법안은 내년 4월부터 시행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모리토모·가케 학원 스캔들 등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강력히 추진해온 ‘일하는 방식 개혁’은 노동자 보호와 함께 생산성 향상 및 노동력 증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은 일자리 문제로 고민인 한국과 달리 실업률이 2009년 5.1%에서 지난해 2.8%로 떨어진 데 이어 지난 5월 2.2%까지 내려갔다.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한 셈이다. 하지만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감소사회로 접어든 일본에선 노동력 감소가 심각한 문제다. 일본 인구는 2008년 최고치(1억2808만명)를 기록한 뒤 지속적으로 감소, 올해 초 1억2520만9903명으로 집계됐다. 10년간 288만명이 줄었는데, 인구 감소 속도가 빨라 조만간 연간 100만명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력 역시 인구 감소와 비례해 급감하고 있다. 최근 일본 실업률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에 따라 일본은 정규직 남성 직원을 중심으로 한 기업 문화를 바꿔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즉 여성과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최대한 활용하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엔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필수적이라는 게 일본 정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기업 전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직원이 회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기업 문화가 오랫동안 유지돼 왔다. 실제로 일본의 노동기준법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 외에 월 45시간, 연 360시간 초과근무가 가능하다. 여기에 노사가 합의만 하면 기업은 직원에게 얼마든지 일을 시킬 수 있어 초과근무가 월 100시간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본의 연간 평균 근무시간은 그동안 점점 단축돼 지난해 1710시간을 기록,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759시간) 수준이 됐다. 한국(2024시간)보다 짧지만 선진국인 독일(1356시간)이나 프랑스(1514시간)보다는 길다. 여기에 정규직의 연 평균 근무시간만 보면 2042시간으로, 정규직 중심으로 장시간 근무 관행이 지속되는 상황이다.
이런 장시간 근무와 잔업 분위기는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2016년 일본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6달러로 OECD 35개국 중 20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60% 수준이고, 주요 7개국(G7) 중에서 꼴찌다. 1인당 노동생산성은 8만1777달러로 OECD 35개 국가 중 21위에 그쳐 다른 선진국들과 큰 차이가 난다. 앞으로 노동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낮은 생산성은 일본 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연간 2000여건에 달하는 과로사 또는 과로자살은 일본에서 심각한 문제다. 2015년 12월엔 일본 최고의 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광고회사 덴쓰의 신입직원이 과로에 시달리다 자살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 직원은 그해 10월 한 달 동안 105시간의 초과근무를 했고 53시간 연속근무를 한 적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아베 내각은 2014년 6월 ‘일하는 방식 개혁’을 성장 전략의 중요 과제로 삼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도 이해 관계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엇갈리면서 4년 만인 지난 6월 말에야 법제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일하는 방식 개혁’은 우선 초과근로 상한을 위반한 기업에 대해 벌금 등 처벌 규정을 도입했다. 다만 업무량이 대폭 증가하는 성수기에는 초과 근무시간을 월 100시간, 2∼6개월 평균 80시간, 연 720시간으로 예외를 뒀다. 또 2023년 4월부터는 월 60시간 이상 시간외 노동에 대한 임금 할증이 중소기업에도 적용된다.
이와 함께 유급휴가 강제 실시 제도를 도입하는 등 노동자 과로사를 막는 장치 마련에 나섰다. 대기업은 내년 4월부터, 중소기업은 2020년 4월부터 적용된다. 이미 일부 기업은 영업시간을 줄이는 등 근무시간 축소를 시행하고 있지만 일손이 부족한 운송업, 건설업, 의료계 등은 5년간 유예를 뒀다.
고용 형태와 관계없이 업무 내용에 따라 임금과 수당 등을 결정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도 일하는 방식 개혁에 포함됐다.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금지돼 대기업은 2020년 4월부터, 중소기업은 2021년 4월부터 적용된다. 일본 정부는 조만간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따른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연봉 1075만엔(약 1억979만원) 이상 전문직을 대상으로 근무시간이 아닌 성과에 따라 임금을 결정하는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도 도입됐다. 이들 전문직은 초과근무를 해도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다. 불필요한 잔업을 줄여 노동시간을 감축하도록 한 것이다. 또 직원이 출퇴근시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플렉스 타임제’,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집 등 사무실 이외의 장소에서 근무하는 ‘텔레워크’, 퇴근 후 다음날 출근까지 일정 시간의 휴식을 보장하는 ‘근무 인터벌 제도’ 등도 포함됐다. 최근 일본을 강타한 폭염 때문에 일부 기업은 이미 올해부터 텔레워크 등을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일하는 방식 개혁’ 법률이 가결된 후 “1947년 노동기준법 제정 이래 70년 만의 대개혁”이라면서 “다양한 근무형태를 가능케 하는 제도가 제정돼 노동자의 과로사를 막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일하는 방식 개혁’ 법안이 노동자보다는 기업 친화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기업에 대한 처벌 규정이 매우 미약하기 때문이다. 초과근무 상한 위반에 대한 처벌 규정을 도입했지만 예외가 너무 많고, 성수기 초과근무 허용 시간도 지나치게 길다. 특히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에 대해서는 과로사를 조장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구체적 적용 대상을 법률이 아닌 규칙에 맡긴 탓에 적용 대상이 늘어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일본 노동계에서는 ‘일하는 방식 개혁’이 아니라 ‘일하게 만드는 방식 개혁’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실제로 과로사 유가족들은 법안 의회 통과 후 “앞으로도 일본에서 과로사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월드 이슈] ‘저녁이 있는 삶’ 도전하는 과로사회 일본
입력 2018-07-29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