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바다 건너편 보이지요? 제 고향입니다. 요즘 꿈에 고향 사람들이 자주 나타나요. 죽을 때가 됐나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26일 인천 강화군 서검도에 사는 실향민 소영주(87·서검교회) 집사는 젊을 때 떠나온 고향 마을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잘 안 들리는 귀를 쫑긋 세우며 말을 이었다.
“몇 만 명 중 겨우 100명씩 만난다고 하는데 그런가요. 기자 양반, 나 좀 고향에 갈 수 있도록 해 줘. 부탁해요.”
다음 달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2년10개월여 만에 열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발표한 ‘4·27 판문점 선언’에 따른 행사다. 남북 당국자는 지난 6월 열린 적십자회담을 통해 상봉행사를 8월 20∼26일 금강산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상봉 대상은 남북 각각 100명씩으로 정했다. 전면적 생사 확인과 상봉 정례화 등은 추후 과제로 넘겼다.
손꼽아 기다리는 상봉이지만 이산가족들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최종 후보자로 선정되려면 무려 57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만 한다.
소 집사에게 이번 상봉행사에 신청했느냐고 묻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며 “그런데 한 달여 전에 대한적십자사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북한의 가족을 찾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연락이었다. 생사 확인을 하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고 했다.
“요즘 기록적인 폭염 때문에 모두들 힘들어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꿈에 그리는 가족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칩니다. 이번에는 정말 만날 수 있을까요?”
소 집사의 고향은 북한 황해도 연백군 송봉면 송현리다. 연백 해안가에서 불과 2㎞ 떨어진 동네다. 날씨가 맑을 때는 훤히 고향 마을이 보인다. 당장 달려가 어머니 산소에라도 큰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는 때때로 ‘마음 속 귀향’을 한다. 북에 두고 온 가족, 고향 마을 사람을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깊어만 갔다.
“아버지는 제가 10살 때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지요. 어머니가 가장 많이 보고 싶습니다. 돌아가셨겠지요…. 동생들 만나면 얼굴이나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소 집사는 “급히 벽장에서 평소 모은 돈을 꺼내 건넨 어머니가 ‘며칠만 숨어 있다 오라’고 하신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틀린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며 물끄러미 고향 쪽을 바라봤다.
그는 이번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소식을 가슴으로 들었다. 동네에 함께 살던 이산가족 몇 명은 벌써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살아계시면 100살이 넘으셨을 텐데…. 생사 확인만이라도 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만나게 된다면, 함께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게 된다면 어머니께 자신이 바다에서 직접 잡은 신선한 회 한 접시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그는 갑자기 “어머니”를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것도 여러 차례. 손수건을 꺼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북한의 가족사진이 혹시 집에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사진 한 장 갖고 오지 못한 게 한(恨)”이라며 “금방 고향에 돌아갈 줄 알았던 거지요. 보고 싶을 때 꺼내 보게 ‘사진 한 장 들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고 했다.
고향 이야기를 좀 더 해 달라고 하자 “그 사람들 너무 했지”라고 했다. 북한 인민군이 동네 주민을 못살게 굴고 심지어 총칼로 위협하고 죽였다는 것이다. 곡식도 약탈해 갔다고 했다. 청년들은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기 바빴다고 했다.
그는 1951년 1·4후퇴 때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고향 앞의 섬인 교동도에서 2∼3년 살다 이곳 서검도로 이사했다.
서검도는 그야말로 최전방이다. 임진강이 끝나는 지점에서 서해 쪽으로 10여㎞ 떨어진 이 섬은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하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민통선) 안에 위치한다. 해상 북방한계선(NLL)이 섬의 북쪽 끝자락인데다 섬 일부는 비무장지대(DMZ)에 속해 있다.
그는 이 섬에서 한평생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았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성실한 청년이라고 소문이 났고 덕분에 참한 동갑내기 이옥님 권사(서검교회)를 만났다. 1남 2녀를 낳고 손주 10여명도 얻었다. 하지만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68년째 바다 건너 고향 마을을 바라보며 망향가를 부르고 있다.
그는 1996년 8월 정부로부터 ‘참전용사증서’를 받았다. 6·25전쟁에 참전해 자유 민주주의 수호와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았다. 뒤늦은 표창이었다. 소정의 연금을 받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20세 한창 젊은 나이 때 6·25전쟁에 참전했어요. 3년여 포병으로 복무했는데,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강원도 전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우리 초소에 적군의 포탄이 떨어져 폭삭 무너지는 바람에 동료들이 많이 죽었어요. 아직도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소 집사네 가훈은 ‘자녀사랑 부모사랑’이다. 가훈은 성경말씀에 따라 만들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들이 건강하게 성장했고 모두 장로와 권사, 집사 등 교회 중직이 됐다.
부부는 찬송 ‘나의 갈길 다하도록’을 즐겨 부른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를 받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한다는 찬송가 가사가 마음에 와닿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소 집사의 아내 이 권사가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옆에서 가만히 기도를 듣고 있던 소 집사는 자신도 기도하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다음 달 이산가족 상봉행사 성공을 위한 기도였다.
“어머니, 생존해 계시면 한 번 뵙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꼭 소식 전해주세요. 저는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 손주들이 알고 싶어 해요.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서검도(인천)=글 유영대 기자
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ydyoo@kmib.co.kr
“저 하늘 아래 어머님이…” 68년째 부르는 망향가
입력 2018-07-27 1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