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안녕하세요, 햇살론 지원센터입니다. 정부가 지원하는 햇살론을….”
반복되는 스팸 전화에 짜증이 밀려왔다. 평소 같으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종료 버튼을 눌러서 전화를 끊었을 텐데 웬일인지 오늘은 멘트를 오래도록 듣고 있었다. 그 짜증나는 멘트의 밑바닥에서 가녀리게 흔들리는, 작은 풀꽃 한 송이가 내 영혼에 보내는 미세한 파장 때문이었으리라.
이 여인은 얼마나 많은 압박과 피로 속에 전화를 하고 있을까. 인격적으로 무시당하고 저질스러운 욕설을 들으면서 작은 풀꽃 같은 삶을 위해 얼마나 흐느끼며 피어나고 있을까. 그 작은 떨림이 내 영혼의 급소를 건드렸나보다. 갑자기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쓰나미가 몰려왔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전화기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뇌가 작동을 멈춘 듯했다. 머릿속이 하얀 백지가 되었다. 사유가 정지되고 온몸의 감각기관이 단 하나의 느낌으로 존재의 뿌리를 흔들었다. 존재에 대한 비애, 세상 모든 존재가 아픔을 먹고 살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워졌다는 생각이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한다. 인간의 뿌리가 이토록 쓰고 아픈가.
여인의 얘기는 시냇물처럼 그치지 않고 흐른다. 내가 전화를 끊기 전에 서둘러 많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빠르게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말을 쏟아낸다. 그것은 마치 내 유년기의 어머니가 지는 해의 꼬리를 붙잡고 몇 고랑의 밭을 더 매기 위해 손놀림을 바쁘게 하던 것과 같다. 여인의 이야기는 해 꼬리를 잡은 어머니처럼 숨 가쁘다. 그녀의 거친 숨결에는 어린 자식의 학원비와 식료품비가 있다. 이번 달 공과금이 있고 친정어머니의 간병비가 있다. 그 잔혹한 것들이 이 여인의 숨을 가쁘게 몰아가고 있다.
내가 전화를 끊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여인은 일말의 희망을 갖는 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에 화색이 돈다. 전화기의 목소리는 점점 안도감을 갖고 차분해진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단지 내가 전화를 끊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과 희망을 갖고 있다.
전화를 끊지 않고 있을 뿐인데 이 사소한 것마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삶이 되고 있다. 누군가가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희망과 위로가 되고 있다. 존재란 이야기의 한 형태이고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그녀는 나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은 대범하게 용서한다. 그것은 한 사회가 오랫동안 지켜왔던 관습과 형벌체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사회의 권력자들, 기득권자들로부터 모함과 추방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존재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예수님은 당대의 윤리와 사회적 통념, 그리고 관습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 존재의 연약성을 보았던 것이다.
인간은 여린 살을 가진 애호박처럼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연대하면서 단단해지고 안전해지려 한다. 외부의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그것을 실현하려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어느 때든지 존재의 불안과 두려움 앞에 예기치 않게 내던져질 수 있다. 죄로 인해 타자화된 존재, 무의미의 미궁으로 던져진 존재, 그 존재의 깊은 곳에 촉수가 닿을 때 눈물샘이 터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향을 잃고 타국을 떠도는 난민은 존재의 불안에 대한 은유다. 사실 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
[김선주의 작은 천국] 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입력 2018-07-27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