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싸랑’ ‘집’….
서툰 솜씨로 그린 꽃다발을 줄지어 만든 글자들. 그런데 이게 작품이다. 조선 후기의 문자도(文字圖), 혹은 혁필화(革筆畵)의 21세기 버전을 보는 것 같다.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아트홀에서 열리고 있는 홍인숙(45) 작가의 개인전 ‘글자풍경’ 전시장에는 제목처럼 글자 그림이 빼곡하다. 화업의 중간결산처럼 2000년 첫 개인전 이래 작업 세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40여점이 나왔다. 초기에는 그림일기처럼 ‘글자+그림’이 병치됐으나 2010년대에는 그림만 있었고, 이번 전시에는 글자만 따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작품은 아이들이나 아마추어의 솜씨를 가장함으로써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한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전한다. ‘밥’이라는 글자에는 벼 이삭이 곁들여졌고, ‘큰 잘못’에는 큰 대(大)자 모양 빨간 리본이 매달렸다. 민화 같기도 하고 만화 같기도 한 그림이지만 실제로는 판화 기법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딱 한 장만 제작하니 회화의 원본성도 동시에 갖는다.
그는 수원대 판화과 출신이다. 학교에서 서양화의 판화 기법을 배우던 그는 그게 맞지 않아 혼자 동양적인 것을 찾아 헤맸다.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지만 상업주의에 실망해 귀국했다.
그러다 30대 중반에 판화교실을 통해 공공미술을 한 것이 전기가 됐다. 판화 속엔 소녀 시절 그렸던 만화 주인공 같은 그림들이 들어왔다. 여기엔 아픈 가족사가 녹아 있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초상을 즐겨 그렸다. 그러다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더는 이전의 작업을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서재에 꽂힌 아버지 책의 귀퉁이에서 어릴 적 자신이 낙서하듯 그려놓은 만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과 여동생을 그린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초등생 그림일기 같은 그림이 탄생했다. ‘어젯밤 꿈속에, 나는 나는 날개 달고∼’ 같은 동요를 눙치듯 ‘작일석몽 아아유비(昨日夕夢 我我有飛)’ 식의 한자 문장으로 바꾸고 그 옆에 가족과 무지개를 그렸다. 홍 작가의 작품 세계는 말하자면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소망하는 길상화(吉祥畵)의 변주다. 7년 만에 여는 아홉 번째 개인전이다. 29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밥’이란 글자엔 벼 이삭이… 민화? 만화? 그림일기 같은 판화
입력 2018-07-22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