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총선 수개월 앞둔 시점에서 출범
강력한 권한 앞세워 개혁 성공
박영선·김희옥·인명진 비대위는 당내 갈등 극복 못해 실패로 끝나
당내 기반·공천권 없는 김병준
첨예한 계파 갈등을 잘 관리한 문희상 비대위 전례 참고해볼만
6·13 지방선거에서 역대 최악의 참패를 당한 야당들이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출범시키며 당 혁신을 통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지방선거 한 달여 만인 지난 17일 김병준 비대위원장 체제를 출범시켰다. 앞서 바른미래당도 지난달 18일부터 김동철 비대위원장 체제를 구성해 당 쇄신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비대위를 만든다고 해서 모두 위기를 잘 수습하고 국민적인 지지를 회복하거나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많은 정당이 위기 상황에서 비대위를 꾸려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난 사례도 적지 않다.
성공한 비대위, 실패한 비대위
역대 비대위 가운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를 받는 비대위는 2011년 말 출범한 ‘박근혜 비대위’(한나라당·한국당의 전신)와 2016년 초 ‘김종인 비대위’(더불어민주당) 정도다. 박근혜, 김종인 비대위는 각각 19대와 20대 총선을 수개월 앞둔 시점에서 출범, 과감한 인적 쇄신을 단행해 선거에서 선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근혜 비대위는 한나라당이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참패와 당 소속 보좌진의 중앙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연루 등으로 홍준표 지도부가 무너진 상황에서 출범했다. 박 비대위원장은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현역 의원 25%를 공천에서 컷오프하는 과감한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당시 친이명박계에 대한 공천 학살과 사당화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152석을 확보하며 과반 의석을 지켰다. 박 비대위원장은 그해 말 치러진 18대 대선에서도 승리해 대통령이 됐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2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자 유력 대선주자였던 박근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당이 재정비되면서 비대위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김종인 비대위는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출범했다. 2015년 말 안철수 의원 등의 탈당으로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의 전신)이 총선을 코앞에 두고 분열 양상으로 치닫자 문재인 당시 대표가 직접 나서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에서 비대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종인 전 의원을 비대위 대표로 영입했다. 김 대표는 당시 “친노무현계 운동권 정당으로는 절대 선거를 이길 수 없다”며 안보와 경제에서 중도층을 겨냥한 ‘우클릭’ 전략을 내세웠다. 또 친노 좌장 이해찬 의원과 정청래 의원 등을 컷오프하며 당내 세대교체와 운동권 색깔 빼기에 주력, 민주당의 20대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당내 기반이 약했지만 문재인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에 비대위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박영선 비대위’(새정치민주연합)와 ‘김희옥·인명진 비대위’(새누리당)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박영선 비대위는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지방선거 패배로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가 사퇴하면서 그해 8월 출범했다. 당시 원내대표를 겸임했던 박 비대위원장은 “투쟁 대신 생활 정치에 주력하겠다”며 비대위 명칭도 ‘국민공감혁신위’로 바꿨지만, 세월호 특별법 협상 실패 등으로 리더십에 타격을 입고 한 달 만에 물러났다.
새누리당은 2016년 20대 총선 참패 이후 김희옥 전 헌법재판관을 비대위원장으로 뽑아 당 혁신을 추진했지만, 친박근혜계와 비박계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두 달 만에 끝났다.
새누리당은 넉 달 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가결 후 갈릴리교회 원로목사였던 인명진 전 윤리위원장을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인명진 비대위는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고 비박계가 창당한 바른정당으로의 의원 이탈을 막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빗발치는 인적 쇄신 요구에도 친박계 핵심인 서청원·최경환 의원만 징계(당원권 정지 3년)하는 데 그쳤다. 인적 쇄신에 실패한 한국당은 결국 19대 대선에서 패배해 야당으로 전락했다. 배 본부장은 “당내 기반이 약한 비주류나 외부인사가 주도하는 비대위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가시적 성과 대신 관리에 치중한 비대위도
이런 과거 사례 때문에 최근 돛을 단 한국당 김병준 비대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전망이 많이 나온다. 김 비대위원장이 당내 기반이 약한 외부인사인 데다 차기 총선이 2년 가까이 남아 공천을 통한 자연스러운 인적 쇄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계파 갈등의 벽을 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김 비대위원장도 이를 의식한 듯 취임 직후 “저는 계파도, 공천권도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당은 첨예한 계파 갈등을 잘 관리한 ‘문희상 비대위’(새정치민주연합)의 전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2014년 9월 박영선 비대위 좌초 직후 바통을 이어받은 문 비대위원장은 “계파 활동을 할 경우 개작두로 치겠다”는 취임 일성과 함께 각 계파 실세인 문재인, 박지원, 정세균 의원 등을 비대위원에 포함시켰다. 문희상 비대위는 이듬해 2월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대표 체제가 출범하기까지 계파 갈등을 상당 부분 누그러뜨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종선 심우삼 기자 remember@kmib.co.kr
[한국정치 비대위의 역사] 위기 때면 구원 등판…쇄신이 성패 갈랐다
입력 2018-07-22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