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건 더 이상 숲속의 공주가 아니라 왕자였다.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tvN)에서 김 비서(박민영)는 유명그룹 부회장 이영준(박서준)이 여자에게 유괴당한 기억 탓에 이성과 키스를 못하자 적극적으로 입맞춤을 시도해 성공했다. 다음 날 이영준은 이렇게 말했다. “어제 이후로 괜찮은 것 같아. 이제 악몽도 안 꾸는 것 같고.”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한다는 디즈니식 서사는 전복됐다. 비서로 고용된 여성이 트라우마에 빠진 재벌 2세를 키스로 구원하는 장면은 시청률 최고 10.6%를 기록했다.
집안일도 우렁각시의 몫이 아니라 잘생긴 총각의 일이었다. ‘당신의 하우스헬퍼’(KBS2)에서 가사도우미 김지운(하석진)은 맘카페에 입소문이 난 청소 전문가다. 할아버지의 너저분한 거실을 보고 눈에 물건이 보여야 편하게 느끼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 선반을 단다. 육아에 지친 주부의 집을 치운 뒤에는 “이 집에 필요한 건 아내의 시간, 남편의 공간”이란 쪽지를 쓰고 퇴근한다. 지상파의 침체기라지만 작품은 시청률 4.1%로 순조롭게 출발했다.
을의 노동 없이 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보통 드라마에 피상적으로 등장했던 비서와 가사도우미가 작품의 주체로 부상했다. 두 작품은 갑을 관계를 뒤집어 권력 구도에 파열음을 낸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퇴사를 선언한 김 비서를 부회장 이영준이 붙잡는 데서 시작했다. 김 비서는 9년 동안 부회장의 커피와 쿠키뿐만 아니라 나르시시즘에 동조하는 심기 보좌까지 담당했다. 언뜻 보기에 부회장이 갑이고 김 비서가 을인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다. 김 비서는 부회장 없이 살 수 있지만 부회장은 그럴 수 없었다. 부회장이 김 비서를 잡기 위해 그녀의 집 앞에 차를 몰고 가 출근길에 운전해주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누가 비서고 누가 부회장인지 권력 구도가 희미해진다.
‘당신의 하우스헬퍼’는 더욱 급진적이다. 우선 가사도우미 김지운이 남성이다. 전통적인 성별 구도가 자아내는 위계를 뒤집었다. 게다가 청소 의뢰를 가려가며 받는다. 한 고객이 화장실 청소를 대충 해달라고 요구하자 “사람 잘못 찾으셨다”고 쏘아붙일 정도다. 특히 디자이너 윤상아(고원희)의 집을 청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미국에 간 남자친구의 빈집에 살며 개를 돌보는 윤상아는 김지운과 청소를 하다가 자신의 사랑이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사실상 연락이 끊긴 남자친구는 개를 산책시켰냐고 다그칠 때만 메시지를 보낸다. 윤상아는 자신이 “개를 돌보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면서 청소를 끝낸 뒤 김지운에게 말한다. “어쩐지 집만 정리된 게 아니라 내 머릿속도 좀 정리된 것 같아요.” 그녀는 개운한 표정으로 남자친구에게 이별의 메시지를 보내고 집을 나온다.
역전된 권력 구도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로는 ‘을의 반란’이 주목받는 사회적 상황이 꼽힌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서는 직원들이 사주 일가의 갑질을 폭로해 목소리를 높였고 거리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피켓을 들었다. 수동적이었던 ‘을’이 적극적으로 ‘을’이기를 거부하게 된 것이다.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을’이 꼭 필요한 ‘갑’님의 이야기… 드라마 속 뒤바뀐 갑을 관계
입력 2018-07-18 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