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20·끝> 김정신 권사

입력 2018-07-20 17:25
파독 간호사 김정신 권사(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1985년 독일 베를린 카이저빌헬름 교회에서 열린 폐결핵 환자 돕기 자선음악회에서 찬송을 부르고 있다.
84년 독일 외국인교회협의회 축제 때 김 권사(앞줄 오른쪽 네 번째)의 모습.
2016년 교회 여신도협회 수련회 때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 권사.
최근 파독 간호사 동료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김정신 권사(왼쪽).
박경란 칼럼니스트
교회 내부에 장식된 2만2000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파르르 떨렸다. 한국어로 찬양을 부르자 성도들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1972년 1월 베를린 카이저빌헬름 교회에서의 첫 한인예배였다. 김정신(74) 권사는 독일인 크루제 목사가 집도한 초창기 예배를 떠올렸다.

당시 크루제 목사는 한국인 아내 한월성 사모와 함께 까만 눈의 간호사들에게 복음의 손을 내밀었다. 김 권사와 크루제 목사의 인연은 67년 한인 간호사 기숙사 기도모임부터 시작됐다. 낯선 이국땅에서 예배를 사모하던 간호사들의 기도 열매였다. 72년 7월부터는 성 요하니스 교회 교육관을 사용해 예배를 드렸다.

“교회 교육관에 성가대가 만들어져 저도 성가대원으로 활동했어요. 찬양할 때 한복을 자주 입었고 성가뿐 아니라 우리 민요도 불렀지요. 당시 금난새 교우가 지휘를 했었어요.”

김 권사는 66년 파독 간호사 1진으로 서백림(서베를린)에 왔다. 당시 동서독은 냉전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베를린은 악명 높은 나치 히틀러의 도시였고, 철의 장벽으로 가로막힌 지대였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1·4후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흐릿한 기억 속에 죽음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황해도에서 3살 때 임진강을 건너는데 배 타는 사람들이 저희 어머니에게 아이는 내려놓으라고 했대요. 그것을 어머니가 업어서 죽음의 강을 건넜던 겁니다. 아주 어릴 때인데 뿌연 안개처럼 어렴풋이 생각이 나요.”

현재의 그는 삶에 초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전쟁 같은 삶의 굴곡을 헤쳐 나온 전사적 당당함이었다.

그가 독일병원에 처음 근무했을 때 하룻밤에 환자 3명이 사망했다. 어눌한 독일어로 사망경위서를 작성하며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침이 되니 탈진되더군요. 도저히 이대로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아 하루 종일 울다가 짐을 쌌어요. 결국 수간호사와 동료들이 말린 탓에 머무른 게 52년이네요.”

76년 한용익 집사와 결혼한 그는 이국땅에서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기도로 물었다. 그에게 다가온 건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이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그것은 영욕의 세월을 지낸 한민족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다. 그때부터 믿음의 기도로 고국의 상황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정치상황은 기도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는 몸담고 있는 교회 성도들과 함께 부르심에 응답하며 행동으로 옮겼다.

유신헌법에 반대하고 투옥된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 명동사건에 관련된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박사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선고 때도 독일 교민과 독일인들이 쿠담거리에서 평화시위를 펼쳤다. 당시 서베를린 종교청 감독이던 샤프 목사가 사형반대 시위를 적극 도왔다. 그는 히틀러 시절 항거한 사람으로, 한국의 독재정권 치하에서 억울하게 투옥되다 석방된 민주인사들을 독일에 오도록 도움을 주었다.

85년 7월에는 재독 여신도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그는 90년 재독 한인교회협회 여신도연합회장으로 봉사했다. 90년부터 매년 8월 한반도평화통일 기도주간을 정하고, 2000년부터는 북한 어린이 돕기 자선음악회 행사에 성가대장으로 마음을 모았다. 교회행사마다 그의 헌신이 함께했다.

시대의 목소리에 부응해 몸을 아끼지 않은 그에게도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결혼 후 82년, 쌍둥이를 임신했지만 자궁의 질병으로 아이를 잃었고 자궁절제수술을 했다. 그 사건으로 평소에 아이를 사랑했던 남편과 김 권사에게 형용할 수 없는 좌절이 찾아왔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혔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교회 성도들의 사랑으로 조금씩 회복돼 갔다.

“남편은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집사가 되고, 저 또한 맡고 있던 성가대의 청년들을 더 품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내 자식인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은 귀한 영적 자녀들을 선물하신 거죠.”

하지만 고난은 또 휘몰아쳤다. 남편이 백혈병을 앓게 되고 골수이식까지 했지만 안타깝게도 2003년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두 손을 놓은 채 눈물뿐이었다. 우울증 증세가 나타났고 기도 중에도 좌절이 찾아왔다. 설상가상으로 2005년 유방에 종양이 있어 검사한 결과 암 진단까지 받았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더 큰 낙심의 파도가 몰아쳤다. 시간이 약이지만 도저히 그 흔적을 모두 없앨 수 없는 기억도 존재했다. 그럴 때 김 권사의 삶을 전격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몸부림치며 주님을 찾았다.

“교회는 오아시스와 같아요. 지친 광야 같은 삶 속에서 목을 축이는 오아시스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지체들이 있어요. 그들의 도움이 컸지요. 그때 성도들이 지금 모두 육신은 종합병원이 되었지만 열정은 쉼이 없어요.”

김 권사는 교회를 ‘물’이라고 했다. 그 안에서 자신은 즐겁게 헤엄친다고 했다. 찬양을 좋아해 성가대장만 25년째다. 매 주일 가장 깨끗한 물에서 찬양으로 마음껏 헤엄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물’에서 쉼과 힘을 얻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고 세상 속에서 낙심한 자의 눈물을 닦아준다. 믿음의 본이 돼야 할 레위인으로 소명을 이어가고 있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