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의견 광고 금지… 민원 싫다고 공론장 막나

입력 2018-07-13 04:00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2번 출구 전광판에 데이트폭력방지법 국회 통과를 촉구하는 광고가 걸려 있다. 투정 제공

12일 오후 1시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2번 출구, 커다란 전광판에 ‘8개월째 통과 안 되는 ‘데이트폭력법’, 의원들에게 심사를 촉구하고 싶다면?’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시민들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전광판에 눈길을 던졌다.

이 전광판 광고는 대학생으로 구성된 정치 스타트업 ‘투정’(TO정치)이 시민의 후원을 받아 이달 초 내건 것이다. 투정은 법안 통과에 손을 놓고 있는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크라우드펀딩(온라인 모금활동)으로 국회 청원을 독려하는 광고를 싣는 활동을 하고 있다. 김예인 투정 대표는 “광고 게재 이후 많은 시민이 이메일 청원을 했고 국회의원 5∼6명이 데이트폭력방지법에 찬성 의견을 내놓는 성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장 다음 프로젝트부터 차질이 생겼다.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가 지난달 말 성·정치·종교·이념의 메시지가 담긴 ‘의견 광고’를 싣지 않겠다고 방침을 정하면서다. 김 대표는 “동물학대범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광고를 낼 계획이었는데 홍보 효과가 가장 큰 지하철역에 광고를 못 싣게 돼 난감하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가 의견 광고 금지 방침을 밝히자 이를 준비해온 시민들의 불만이 폭주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론장의 축소를 우려한다. 또 의견 광고를 규정하는 기준이 없어 공사가 자의적으로 광고 게재 여부를 판단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크라우드펀딩 및 광고업계에 따르면 익명 창작자 ‘화장실수호대’가 준비한 ‘몰카 범죄 규탄 프로젝트’도 무산될 위기다. 화장실수호대는 불법촬영 금지를 강조하는 지하철 광고를 싣기 위해 지난 5월부터 모금활동을 벌였다. 목표 금액인 100만원을 넘는 154만원을 116명에게서 모았으나 해당 광고는 개인의 주장으로 분류돼 실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지하철 광고를 통해 목소리를 내왔던 시민단체는 분노를 표했다. 의견 광고가 금지되기 직전 광고 계약이 체결돼 채식주의 홍보 광고를 실을 수 있었던 이지연 동물해방물결 대표는 “상업광고는 허용하면서 시민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건 공익을 위한 일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무엇을 의견 광고로 볼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논란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서울교통공사는 ‘의견 광고 금지’라는 큰 방침만 정하고 세세한 기준은 마련하지 않은 상태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광고 문의를 받으면 자체 광고심의위원회에서 사례별로 의견 광고 여부를 판단해 기준을 마련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범석 세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연예인 응원 광고는 상업광고로 분류해 허용된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정치색을 띠거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연예인을 응원하는 광고는 의견 광고인가 상업광고인가”라며 “서울교통공사는 페미니즘 광고 등으로 인한 민원을 피하고 싶었겠지만 광고학에서도 의견 광고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없는 만큼 논란이 계속될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다양한 의견이 교류될 수 있는 장이 축소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춘식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의견은 공개 장소에 표출돼야 사회 갈등이 완화될 수 있다”며 “인터넷 커뮤니티 등 본인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모인 고립된 장소에서만 의견이 교류되면 사회가 분열에 이를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