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민족은 오랫동안 거주할 곳을 찾지 못해 중근동 지역을 떠돌았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랬다. 심각한 기근으로 굶주리며 생존의 위협을 받던 야곱 가족을 받아준 나라는 이집트였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난민이었다. 난민을 받아준 이집트는 흥왕했다. 요셉으로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듯 이집트도 복을 받았다.
그랬던 제국이 나그네를 노예로 부리기 시작한다. 나면서 죽을 때까지 등이 휠 것 같은 노동과 학대를 당한다. 못살겠다고 울부짖는 처량한 노예를 불쌍히 여긴 것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그 제국을 가차 없이 심판하셨다. 열 가지 재앙으로 초토화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나그네를 환대한다. 세상의 제국은 나그네를 적대한다. 내가 사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우리가 꿈꾸는 나라가 애굽은 아니리라. 출애굽이 살길이지 환애굽은 아니다.
그분의 음성이 들린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 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이다.”(출 23:9)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 심정을 아는 법이다. 남의 땅에서 주권도 인권도 없이 태어나 강물에 던져지면 그만이고, 죽으면 땅에 파묻으면 그만인 한 맺힌 세월을 보낸 성경 이야기를 읽고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서러움을 잘 알지 않을까.
모세는 또 어떤가. 그도 난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대제국의 왕자가 하루아침에 나그네 신세가 됐다. ‘타국에서 나그네’(출 2:22)가 돼 굶어죽기 딱 좋은 그를, 문화도 종교도 다른 이방 종교의 제사장이 거둬줬다. 모세의 종교를 전파한다고 위험을 느끼거나 위협을 가하지 않은 이드로 덕분에 모세는 살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됐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 성도를 난민으로 규정했다.(벧전 1:1·17, 2:11)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갓 태동한 신앙운동인지라 소수일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다수와 주류로부터 위험한 집단으로 오해받았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내 나라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거류민이 거주민이 되고 나그네가 주인이 돼 나그네를 몰아낸다면, 나그네로 박해받았던 신앙의 후손이 맞을까.
장 칼뱅도 난민이었다. 조용히 은둔하며 학문적 성공을 바라던 그를 겁박하다시피 붙잡은 제네바에서 투표를 할 수 없고 공직을 맡을 수도 없는 난민이었다. 추방도 당했다. 제네바 생활 20년이 훌쩍 지나 죽기 5년 전에야 시민권을 겨우 획득했다. 해서 위대한 칼뱅은 난민을 돕는 자발적 기금을 마련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래서일까. 제네바에 유엔난민기구(UNHCR)가 있는 것은 우연일까. 칼뱅의 후예가 다수를 차지하는 한국교회가 칼뱅의 길을 따르는 것은 예정일 것이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은 헨리 나우웬은 자신과 이웃,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세 측면에서 대답을 시도한다. ‘영적 발돋움’에서 그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적대를 환대로 바꾸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우리의 삶 속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다. 타인을 내 통제권 아래에 두지 않고 ‘자유롭고 친밀한 공간을 마련해 주기’가 환대의 실천이다. 난민을 위한 공간 만들기는 성령 안에서 사는 길이리라.
아프리카 콩고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한국 땅에 정착한 욤비 토나 광주대 교수가 쓴 ‘내 이름은 욤비’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빼곡하다. 욤비가 난민으로 인정받는 데만 6년이 걸렸다. 그가 겪은 한국엔 상반된 세상이 공존한다. 난민을 친구처럼 받아주는 사람과 피부색 등 외모로 차별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야박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 같이 산다. 욤비는 말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 친구라고.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김종철 변호사다. 김종철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기독교 세계관 논문도 쓰는 학구적인 변호사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난민과 이주민을 전문적으로 돕는 변호사가 됐다. 그간의 노력과 연구공로를 인정받아 미 국무부가 제정하고 폼페이오 장관과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고문이 수여하는 ‘인신매매 방지 영웅상’을 받았다. 김 변호사는 욤비의 책 맨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장식했다. “제 인생을 걸고 장담하건대 난민과 친구가 되는 일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난민이 이 땅을 찾아온 난민과 친구 되는 일이 어찌 가치가 없을까.
김기현(로고스교회 목사)
[시온의 소리] 난민이 난민에게
입력 2018-07-10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