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수십 년째 이어진 열악한 병원 내 노동 조건 개선 요구에도 꿈쩍하지 않던 국내 유수의 대형병원에서 속속 사건사고가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열악하다 못해 참담한 병원 노동 여건이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환자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병원들은 의료수익 하락과 경영 악화 등의 이유로 처우 개선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맞선다. 이런 대결 국면을 키운 건 보건당국이다. 보건의료계를 관장하는 보건복지부는 사실상 손을 놓은 채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방관했다.
보훈병원 재직 노동자 C씨가 말했다. “인력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병원장은 인력 충원 권한이 보훈공단 이사장에게 있다고 하고, 보훈공단은 기획재정부의 결정 사안이라고 한다. 이러는 사이에 노동자들은 계속 어려운 상황에서 내몰리고 있다.” 또 다른 대학병원 노동자는 “이것이 병원인가, 지옥이다”라고 일갈했다. 이들의 자조 섞인 탄식에는 작금의 의료기관이 어떤 상태인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급기야 지난달 27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위원장 나순자, 이하 보건의료노조) 지역본부 소속 조합원 수천 명이 서울역광장에 쏟아져 나왔다. 속속 광장에 모여든 이들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분노와 답답함, 절실함의 눈빛으로 가득한 광장은 가뜩이나 후덥지근한 날씨를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날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환자안전과 노동존중병원 만들기를 요구하며 집회와 거리행진에 나섰다. 늦은 오후까지 이어진 거리 행진은 마무리집회로 끝이 났다. 보건의료노조는 7월 한 달 동안 이 문제에 집중해 변화의 물꼬를 튼다는 계획이다. 청와대 국민청원도 시작됐다. 2일 기준 청원에는 9400여명의 국민들이 동참했다. 이들의 외침은 하나였다. “제발 현재의 병원을 바꿔달라.”
사실 이들의 요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 38명이 사망한 메르스 사태에서 감염이 주로 이뤄진 곳이 대형병원이라는 점에서, 또 46명이 사망한 밀양 세종병원 화재에서도 병원의 시스템이 얼마나 후진적이고 가혹한지가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이를 지적한 언론보도도 쏟아졌지만, 그때뿐이었다.
이후 세간에 충격을 준 이대 목동병원 신생아 집단 사망사고나 집단 결핵감염사고, 숱한 수술사고, 잘못된 투약사고, 혈액 수혈사고 등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사고들은 병원의 구조적 문제점에 기인한 인재라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여기에 빈번한 사직과 과로사, 신규간호사 자살사건, 폭언·폭행사건, 병원내 갑질사건과 인권유린 등은 우리나라 병원의 민낯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 해도 해도 일이 끝이 없다=보건의료노조는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에 의뢰해 2018년 3월부터 4월까지 병원 노동자 5만7303명을 상대로 병원 노동실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총 2만9620명이 응답한 조사 결과는 아찔하다. 응답자의 81.8%(2만3894명)는 인력 부족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간호사의 86.6%는 절대적인 인력 부족을 호소했다. 간호사의 부서내 인력 부족에 대한 인식도(86.6%)는 전체 평균(81.8%)보다 높았다. 그리고 인력 부족은 업무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있었다. 업무 강도 심화가 가장 큰 문제로 꼽혔으며(83.4%), 건강 악화(76.1%), 사고위험 노출(69.8%), 직원 간 갈등(48.6%)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인력부족이 야기하는 문제는 비단 직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병원 노동자들은 인력부족이 환자 안전 및 의료서비스 질 하락으로 이어진다며 우려하고 있었다. ‘환자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다’가 68.6점, ‘환자 및 보호자들을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다’ 67.9점, ‘환자에게 제공할 의료서비스 질이 저하됐다’ 68.1점, ‘의료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높다’ 69.0점으로 조사됐다.
“아프다는 환자를 바쁘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해서 달을 보고 퇴근할 때까지 숨 쉴 틈도 없이 뛰어다닌다. 4개 병실을 2명이 봐야하는데, 병원은 경영 사정이 어렵다며 간호사 1명을 줄였다. 환자 파악도 못한 신규 간호사가 환자에게 주사를 놓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방 국립대병원 간호사 A씨)
일손이 부족하다보니 시간외 근무는 당연시됐다. 그렇다고 연장근무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문에 응답한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은 ‘근무 시간 내 마칠 수 없을 정도의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다’고 밝혔다(50.5%). 잡무 강도도 상당했다. 업무 외 조회, 교육, 회의, 행사, 평가, 논문 등을 감당하느라 본인의 기본 업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응답자의 69.6%에 달했다. 최근 3개월 동안 응답자의 76.5%가 시간 외 근무 경험이 있었으며, 이 역시도 간호직군의 비중이 높았다. 이른바 ‘공짜노동’을 경험한 이들은 응답자의 48.0%이었고, 일부 보상을 받는다는 답변은 31.5%로, 80%에 달했다.
적은 인원이 더 오래 일하면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높은 이직률로 이어졌다. 실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1.7%가 ‘이직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간호사의 83.6%는 최근 3개월 내 이직을 고려한 적이 있는 것으로 평균보다 높은 이직 ‘충동’을 경험하고 있었다. 열악한 근무조건은 숙련된 병원 노동자를 병원 문밖으로 떠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79.6%).
◇사람답게 살고 싶다=“내 꿈은 병원을 관두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그렇지만 나 혼자 퇴직하면 남은 후배들은 여전히 지금처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국립대병원 재직 간호사 B씨) 보건의료노조는 병원노동자의 근무조건 개선과 인력확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바라보고 있다. 병원노동자의 근로조건과 업무만족도가 환자안전과 의료서비스의 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인력부족, 장시간노동, 열악한 근무조건, 낮은 업무만족도, 높은 이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게 노조가 이번 행동에 나선 이유다.
서울을지병원에서 일하는 D씨는 “파업 이후에도 저임금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재단은 병원 문제는 병원장과 해결하라고 말한다. 병원과 직원간 임금에 대한 인식 차는 여전하다”고 귀띔했다. 이화의료원의 E씨도 “심각한 인력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병원에 거듭 요구하지만,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의료 수익 등을 고려하면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신생아 사망사고 이후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불신이 높아 직원들은 인력 부족과 감정노동을 함께 겪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한탄과 호소의 목소리는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사태를 관망하는 모양새다. 보건의료노조 나순자 위원장은 “최근 여러 병원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사건·사고는 비정상적인 노동 여건에서 비롯됐다”며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양균 쿠키뉴스 기자 angel@kukinews.com
[김양균의 현장보고] “안전한 병원 만들자” 탄식… 분노… 그리고 희망
입력 2018-07-0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