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 & deep]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독인가 약인가

입력 2018-07-03 04:01
국민연금공단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속도를 내면서 우려와 기대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오너 지배체제가 강한 한국 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경영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반면 기업에 대한 정부 입김이 강력해지는 ‘연금사회주의’의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반박도 거세다. ‘증시 공룡’ 국민연금의 참여 여부에 따라 한국의 스튜어드십 코드는 판도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주권 강화, 약인가

2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등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오는 23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안건으로 올릴 방침이다. 기금운용위 내부에선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대해 대체로 찬성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주주권 강화 수준을 두고선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전해졌다. 위원회 개최 전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나눠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스튜어드)처럼 투자한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행동 지침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게 되면 국민연금은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국내 기업 298곳(지난해 말 기준)에 지금보다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반기는 쪽은 주주 영향력에 주목한다.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지나치게 강한 기업 지배구조를 견제할 수 있다는 취지다. 스튜어드십 코드로 기업 경영의 투명성이 높아지면 증시에도 긍정적이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스튜어드십 코드의 기본 정신은 의결권 행사를 통해 기업들에 ‘갑질’을 하자는 게 아니다. 기업 가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국가에서는 연기금과 기관투자가의 스튜어드십 코드 참여가 활발하다. 영국은 2010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다. 기관투자가의 투자회사 경영진 견제 실패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생 원인 중 하나라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세계 최대 연기금인 일본공적연금펀드(GPIF)는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받아들였다. 적극적인 주주활동으로 투자기업의 장기 수익률을 높이고 투자기업의 지배구조 개선도 이끌고 있다.

국민연금도 최근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라는 움직임에 발을 맞추는 분위기다. 대한항공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최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갑질·밀수·탈세 의혹과 관련해 우려를 표명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를 두고 국민연금이 사실상 스튜어드십 코드를 행사하고 있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송민경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스튜어드십 코드 센터장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다면 당장 가시적 활동보다는 대한항공 사례처럼 의견서를 보내거나 미팅을 요청하는 방법을 주로 쓸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활동을 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히면 기업들도 내부적으로 (연기금 등의 견제를)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부의 기업 지배 논란도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용하면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을 지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찮다. 이른바 ‘연금사회주의’다. 지금처럼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고 있는 한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장 전문가는 “삼성물산 사태처럼 정부 압력에 따라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 걱정된다. 의결권 행사와 관련해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지금보다 높은 수준으로 보장할 수 있는 장치들이 갖춰져야 하는데 복지부가 현재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주 영향력이 세지면서 해외 투기자본이 과도한 배당을 요구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기업의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당장 ‘단물’만 빨아먹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를 별도 법인으로 떼어놓는 등 독립성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해외 연기금의 경우 여러 장치를 마련해 ‘정치권 입김’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네덜란드공적연금(ABP)은 2008년 민간 자회사인 자산운용공사를 설립해 기금 운용을 맡겼다. 송 센터장은 “현재 국민연금의 의결권전문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전문가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토론하는 식으로 주주 활동을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