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2월 제주 땅을 밟은 이기풍 목사는 도착하자마자 제주 이호리에 사는 청년 김재원(당시 30세)씨를 수소문했다. 이 목사가 제주로 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게 김씨의 편지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호리에서 기독청년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김씨는 1903년 하나님을 만났다. 복막염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방문했던 서울 제중원(현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국 의학교육의 선구자였던 의료 선교사 에비슨 박사로부터 복음을 들었다. 에비슨 박사가 보기에 김씨의 상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처음엔 치료를 거절했지만 김씨 부자의 간절한 부탁에 “살고 죽는 건 하나님 손에 달렸으니 하나님을 믿으면 최선을 다해 치료해 보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러겠다고 했다. 놀랍게도 김씨는 7번의 수술 끝에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김씨는 이듬해 마태복음 쪽복음서를 여러 권 들고 건강한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씨가 살던 동네는 난리가 났다. 죽은 줄 알았던 김씨가 살아온 것도 모자라 “서양 귀신을 데려왔다”며 배척했다. 이웃들에게 멍석말이를 당하는 등 핍박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김씨는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술 자국을 보여주며 간증했다. 몇몇 청년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김씨는 기독교 모임을 이어갔다. 김씨가 목회자의 필요성을 느낀 것도 이즈음이다. 그는 에비슨 박사에게 편지를 써 사역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비슷한 시각 평양에선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김씨 편지가 소개됐고 이 목사가 “복음의 빚을 졌다”며 제주도로 가겠다고 나섰다. 이 목사는 제주도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함께 가던 동료 모두를 잃었지만 끝내 제주 땅을 밟았다. 이 목사가 세운 제주 최초 교회인 성내교회에서 22대 목자로 섬기고 있는 강연홍 목사는 “제주와 평양 두 복음의 물줄기가 흘러 하나님의 복음이 이 땅에 전해졌다”고 말했다.
성내교회의 시작은 김씨와 함께 제주도 초대 교인이었던 김행권씨의 향교골 초가집이었다. 지금의 성내교회 터로 옮긴 건 제주도 입도 후 2년이 지난 뒤였다. 당시 귀향 와 있던 개화파 박영효 대감의 헌물로 출신청(조선시대 무예 출신들이 집무하던 관아) 건물을 예배당으로 썼다. 성안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성내교회란 이름이 붙여졌다.
제주선교대회에 참가한 한국대학생선교회 3만여 청년 중 1000여명은 28일 성내교회에 들러 이 목사와 제주 첫 믿음의 청년들의 발자취를 간접 체험했다. 송진경(22)씨는 “지금까지 제주도를 여행지로만 생각했는데 제주 선교 역사를 들으면서 이곳 역시 선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제주 복음화가 기도 제목 중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정예헌(22)씨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며 “세상의 피난처가 됐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주=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제주에는 이기풍 목사 부임 전 기독청년 모임 있었다
입력 2018-06-29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