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8주년] ‘내 양을 버리고 어디로…’ 목숨과 바꾼 믿음의 씨앗

입력 2018-06-25 00:00 수정 2018-07-04 10:12
박범 목사가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6·25전쟁 때 순교한 증조부 박경구 목사의 가르침과 대를 이은 목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 뒤로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의 순교자기념탑이 보인다. 송지수 인턴기자
경기도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설치돼있는 박경구 목사 존영.
전쟁은 학살(虐殺)을 낳는다. 학살은 증오와 원한을 낳고 보복으로 이어진다. 6·25전쟁은 지독한 전쟁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공산정권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수가 살해당했다. 남북 화해의 시대가 왔다. 하지만 순교자 후손들의 마음은 꽁꽁 닫혀 있기 마련이다. 눈앞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숨진 기억은 후손들에게 대물림된다. 지금도 북한이라면 진저리를 친다.

여기 조금 결이 다른 순교자 후손의 이야기가 있다. 박경구(1903∼1950) 목사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으며 황해도에서 목회를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됐다가 해방을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 당일 체포돼 황해도 해주 감옥으로 끌려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퇴각하며 옥 안의 사람들을 끌어내 총살했는데 박 목사는 고문 끝에 죽였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박 목사의 증손자인 박범(37) 목사를 지난 22일 만났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증오와 원한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작은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터뷰는 서울 지하철 종로5가역 인근 카페 길동무에서 진행됐다.

-대를 이어 목회를 하시는 거네요.

“고조부는 1913년 한국교회의 첫 중국 파송 선교사였던 박태로 장로셨고 증조부가 6·25 때 순교자인 박경구 목사, 할아버지는 장로회신학대학 학장(지금의 총장)을 지낸 박창환 목사입니다. 아버지와 제가 이어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목회 해야지’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방황하다 대학은 공대를 진학했지만 훗날 회심했어요. 서울 연신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올해 개척했습니다. 이곳 카페 길동무를 빌려 열명 남짓이 주일예배를 드립니다.”(카페 길동무는 탈북자 사역을 하는 곳이다. 바리스타가 모두 새터민들이다. 이북 사투리를 진하게 쓰면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추출한다. 북한 선교의 꿈을 이어가는 터전에서 한국전쟁 순교자 목사의 후손이 대를 이어 목회를 하고 있다.)

-증조부는 왜 북에 남으신 걸까요.

“제가 목회를 하며 증조부와 조부에게 얻은 두 개의 말씀을 가슴에 품게 됐어요. 순교를 택한 증조부께선 남으로 피신하라는 권유가 있을 때 ‘내 양을 버리고 어딜 가겠는가’라고 하셨대요. 다른 순교 목회자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내 신앙과 목회와 가족과 삶을 지키자는 맘으로 남아있던 거죠. 서울 장로회신학교 1기 졸업생인 할아버지는 ‘한 영혼도 소중히’라고 당부하세요. 지금도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죠.”

-순교자 유가족들의 맘이 쉽게 풀리진 않을 텐데 목사님은 좀 다를까요.

“저도 북한 체제는 미워요. 증조부는 해주 감옥에서 ‘순악질 박 목사’로 불렸대요. 북한 체제를 끝까지 거부해 ‘총알도 아깝다’며 즉각 처형하지 않았답니다.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는 고문을 했다고 당시 감옥에서 살아남은 분이 할아버지께 증언했어요. 하지만 사람을 미워하진 않아요. 내 양을 먹이고 한 영혼을 소중히 하는 건 목회자의 기본자세이지요. 그들도 구원받을 대상이고요. 북한의 통치체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게 먼저일 거고요. 그런 움직임도 남북 화해 시대에 반영됐으면 좋겠어요.”

한국교회에서 파악한 한국전쟁 기독인 순교자는 190명이다. 경기도 용인 추계리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이들의 존영(尊影)이 안치돼 있다. 1866년 평양 대동강변에서 첫 순교한 영국 출신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에 이어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까지 총 265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이 가운데 손양원 목사, 문준경 전도사 같은 6·25전쟁 순교자가 72%를 차지한다. 기념관을 지키는 김순식 목사는 “2000명이 넘는 기독교 순교자 가운데 증언과 자료가 수집된 분들 위주로 일부만 모신 것”이라고 말했다.

순교자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혜촌 김학수 화백이 그린 평양 대동강변의 토마스 선교사 순교 모습이 1층 벽면에 걸려 있다. 그 위에는 역시 대형 사진으로 1984년 8월 15일 옛 서울 여의도광장 전체를 뒤덮은 100만 성도들이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를 보는 모습이 전시돼 있다. 당시 8월 15일부터 나흘간 350만명의 기독인들이 지금의 국민일보 앞 여의도공원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복음의 씨를 뿌리고 수백만배 열매를 맺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 한국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박범 목사에게 물었다. 증조부는 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려 했는지 궁금하다고.

“저는 자유의지라고 봅니다. 남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신앙과 목회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어요.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하나님을 선택해서 스스로 찾아가는 것. 그런 자유의지를 북에 알려주고 돌려주고 싶어요.”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