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성육과 번역의 종교

입력 2018-06-22 00:01

“세계 종교 가운데 기독교는 창시자의 언어가 아닌 제3의 언어로 경전이 기록된 유일한 종교다.”

수년 전 토착어 성경의 번역과 보급의 관점으로 세계 선교역사를 재조명한 자리에서 선교역사학자 앤드루 월즈가 언급한 말이다.

그렇다. 경전이란 종교의 창시자가 사용한 언어로 기록되는 게 상식이다. 코란은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가 사용한 아랍어로 기록됐다. 힌두 경전들도 힌두교를 태동시킨 브라만 승려들이 사용한 산스크리트어로 베다경을 기록했다. 이는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인데 신약성경은 당대 로마제국의 공용어인 헬라어로 기록됐다. 즉 기독교의 경전은 처음부터 번역 과정을 거쳐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기독교를 ‘번역의 (또는 번역된) 종교’라 부른다.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언어가 아닌 고대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기록됐다는 사실의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창시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문자적으로) 보존하는 데 가치를 부여한 일반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처음부터 메시지의 전달과 소통에 강조점을 둔 ‘선교적 종교’였다.

언어란 메시지를 담는 그릇(형태)이다. 구약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나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 자체가 거룩한 게 아니라 거기 담긴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발흥과 팽창으로 헬레니즘의 영향력이 확산되면서 헬라어가 대다수 사람이 사용하는 대세 언어가 됐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서들을 포함한 신약성경 전체가 헬라어로 기록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구약성경 인용도 히브리어 원문보다 중간기에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LXX)’을 주로 사용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진리를 번역하셨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부터 선재하신 말씀, 즉 헬라 철학이 추구하는 영원한 진리(로고스)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한다. 그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곁에 오셨다고 설명한다. 영원한 진리를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로 번역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비로소 인간들에게 영원한 진리가 소통될 수 있었다.

복음의 이해를 위해선 그리스도의 신성뿐 아니라 인성도 중요하다. 주께서 ‘인자(人子)’를 강조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학자 티머시 테넌트는 “(성육을 통해) 신성이 인성으로 번역됐는데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치 번역의 대상 언어처럼 사용됐다”고 평가한다.

성육이라는 번역 원리는 복음 전파의 핵심 원리다. 선교의 역할 모범이신 그리스도(요 20:21)의 방법과 원리가 곧 성육이었기 때문이다. 선교는 다양한 대상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소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 사역이란 생소한 언어와 문화, 관습, 환경 등을 배우고 적응해 대상의 눈높이에 맞추는 섬김이라고 할 수 있다.(고전 9:19∼23) 대상을 우리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가 대상에게 맞추는 일이므로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익숙한 것들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행 15장)

특정 방식이나 형태의 우월감에 근거한 ‘갑질’은 아랍어만을 고집하는 이슬람의 독선과 유사한 반선교적 행위임을 깨달아야 한다. “(획일적) 이슬람 문화나 문명과 달리 방대한 지구촌 전역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고정된 기독교 문화나 문명이란 없다”는 월즈의 말을 다시 곱씹어야 한다.

이쯤에서 한글 성경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교단이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개역한글판 또는 개역개정 성경이 과거엔 적절했을지라도 과연 현대인의 눈높이에 제대로 맞추고 있는지를 말이다. 이들 성경의 언어는 기존 교회와 성도들에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세상에선 생경한 표현과 어투일 수밖에 없는 이 언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반선교적 불통을 즉시 멈추고 성육적 소통의 새 시대를 과감히 열어야 한다.

정민영 (전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