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8> 박명희 집사

입력 2018-06-23 00:01
파독 간호사 박명희 집사(왼쪽 첫 번째)가 2011년 교회 구역예배에서 교인들과 함께한 모습.
1959년 이화여대 간호학과 동기생들과 함께한 박 집사(둘째 줄 오른쪽 두 번째).
간호학과 가관식(간호사들이 임상실습을 시작하기 전에 간호사의 상징인 모자를 받는 의식) 때 어머니, 친구와 함께한 박 집사(가운데).
최근 자택 정원에서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박명희 집사.
박경란 칼럼니스트
13세 소녀는 크림전쟁의 숭고한 천사 ‘나이팅게일’을 읽으며 오열했다. 감동이 복받쳤다. 당시 6·25전쟁이 한창이었다. 나이팅게일처럼 전장에 나가고 싶었다. 곧바로 인민군 본부로 내달렸다. 이데올로기는 상관이 없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거절당하자 2년 후엔 육군본부로 갔다. 군인들 눈에 그는 철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박명희(81) 집사는 어릴 때부터 천진한 욕망과 열정이 꿈틀거렸다. 장롱 안에 숨은 아버지를 잡으러 온 인민군을 따돌렸고, 전쟁통에 어른만 동원되는 부역에 부모 대신 나가기도 했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연백으로, 또 개성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보냈다. 1948년 집 근처에서 몇 번의 총격이 있자 동생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서울 할머니 집으로 내려왔다. 3개월 후 아버지도 남은 가족과 함께 남으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전쟁이 발발했다.

56년 그는 이화여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매주 채플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인간애에 주목했다. 이웃사랑을 강조한 예수님이 희망으로 다가왔다. 전국 곳곳으로 계몽운동을 다니면서 남 돕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원래 중학교 3학년 때 성당에 나갔어요. 그런데 아버지 부임지 때문에 이사를 갔는데 교회 십자가가 확 눈에 띄는 거예요. 꼭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아 그때부터 저 혼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학졸업 후 의례히 가는 병원 간호사의 길을 마다했다. 누구나 바라는 교육자의 길도 포기했다. 그 길은 누가 봐도 꽃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삶처럼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택했다. 당시 전쟁고아가 많았다. 헐벗은 이들이 지천이었다. 전남 목포 영아원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집에서는 과년한 큰딸의 목포행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영아원에서 일하는 동안 잠을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목포 바닷가를 한가하게 거닐어본 기억도 없다. 사명이 있었기에 피곤함도 몰랐다.

그는 ‘신명을 바쳐 일한 인생 최고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가난과 병마로 뼈가 앙상한 고아들은 그의 사랑으로 점점 회복돼 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짧은 인생을 마감하는 아이도 있었다.

“새벽에 아가들이 아프면 병원으로 달렸어요. 업은 아이가 이미 죽은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면 하루 종일 안고 울었어요. 그때 영아원을 운영하시는 장로님이 ‘그 아가는 박 선생 사랑을 받고 떠났잖아요’라며 위로하셨지요.”

그곳에서 박 집사는 일생일대의 사랑을 만났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또 하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이성(異性)과의 교감이었다.

“제 나이 스물셋에 첫사랑이었죠. 그 남성분은 나보다 두 살 어렸고…. 하지만 인생에서 각자의 사명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분의 고모가 저를 교회로 이끌어줬어요. 그때 하나님을 깊이 알아갔지요.”

팔순이 넘은 박 집사의 볼이 ‘첫사랑’이라는 말에 발개졌다. 문득 ‘사랑은 천지창조의 시작이고…’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말이 떠올랐다. 사랑은 어쩌면 모든 인간에게 창조의 시작인지 모른다. 그에게 첫사랑은 ‘인생의 길에서 기쁘게 삶을 대면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추억’이었다.

1년 뒤 박 집사는 아버지의 뇌졸중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했다. 이후엔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의 보건행정 간부로, 청주 희망원과 서울 충현 영아원에서도 일했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충현 영아원에서는 교사들이 묵는 기숙사를 마다하고 고아들과 가장 가까운 후미진 다락방에서 생활했다. 그곳은 언제든 아이들이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목포에서의 삶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그분과 헤어진 지 10년 후 서울 무교동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당시 박 집사는 이미 다른 남성과 결혼하고 두 명의 아이를 낳은 후였다.

“그때 춘천간호학교(현 한림성심대학교)에서 교수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지요. 서울을 떠나고 싶었어요. 거기서 5년을 일하다 파독 간호사가 됐지요. 제자들이 먼저 독일로 갔어요. 저는 막차를 탄 셈입니다.”

75년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독일을 ‘하나님이 제공한 도피처이자 귀양살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온 삶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학벌이나 가문은 그에게 한낱 군더더기였다. 독일병원에서 간호학교 제자들의 동료로 공손한 삶의 길을 걸었다. 과거를 생각할 때 뭔지 모를 가슴속 통증이 스멀거리면 십자가 앞으로 달려갔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를 회복시키며 본연의 존엄성을 일깨워주셨다. 박 집사는 5년 후 두 아들을 데려와 독일에서 의사로 훌륭하게 키워냈고 이웃에게도 희망을 선물하는 ‘엄마’이자 ‘왕언니’였다.

그의 곁에는 외롭고 병든 성도들이 있다. 가정문제와 암 투병으로 고통받는 교민을 위로하고, 오갈 데 없는 이민자들에게 손을 내민다. 홀로 사는 그는 방 한 칸을 비워놓고 누구나 오면 묵을 수 있도록 한다. 생활이 고단한 교회 청년을 불러 소리 없이 음식을 대접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팔십 노구에도 손수 삼겹살을 구워 청년의 배를 채워주며 다독인다. 세월을 이긴 얼굴엔 온화한 섬김의 그리스도가 풍겨난다. 백발 나이팅게일의 미소가 그의 얼굴에 보석처럼 빛난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