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면 안 될 이야기가 꽁꽁 숨어있을 때가 있다. 부산대 김재호 교수가 되살려낸 부산대 초대총장 윤인구(1903∼1986) 이야기가 딱 그런 경우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또 그가 했던 일들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부흥의 우물’(아르카)을 읽는 동안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숨겨져 있던 것도 신기하지만, 깊이 파묻혀있던 스토리가 되살아난 과정 또한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 일은 연구비 잘 따내고 학생들 괴롭히기로 소문난 ‘가가멜 교수’ 김재호 전자공학과 교수가 2007년 부산대 문화콘텐츠개발원장에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예수님을 만난 지 10년 된 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앞에 두고 기도하던 그는 ‘윤인구를 세상에 드러내라’는 마음을 받았다. 전혀 알지 못했던 초대총장의 삶을 학생들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윤인구를 기억하던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자료를 찾으면서 김 교수의 삶은 송두리째 변하기 시작했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50년 전 기억을 더듬어 내놓는 이야기는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학생들과 박태권 원로교수를 찾아가 인터뷰하던 중 그는 “윤 총장이 가장 기뻐하신 때가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내심 총장 취임할 때, 본관이 완공됐을 때와 같은 답변을 기다리던 그에게 박 교수는 “우리(학생들)를 만날 때 가장 기뻐하셨다”고 대답했다.
실망감에 인터뷰를 중단하고 돌아온 김 교수는 그날 밤 하나님께 하소연과 다름없는 기도를 했다. 그때 불현듯 ‘교수 생활에서 너는 무엇이 가장 기쁘더냐’는 물음에 직면한 그는 주저앉아 탄식하며 회개했다.
“나는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그때까지 교수로서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을 진정 존재 자체로 기뻐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높아지는 것을 사랑했다. 그러니 학생들을 교육하는 본질이 ‘그들을 존재적으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84쪽)
윤인구의 발자취를 찾아가면서 김 교수는 한국전쟁 직후 절망적인 이 땅에서 학생을 내 아들, 내 딸같이 사랑하며 비전을 심어주던 진짜 스승의 모습을 만났다. 원래 윤인구는 일본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신학부와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신학대학원에서 12년간 선진 문물을 배웠던 목회자요 신학자였다. 1931년 경남 지역 3대 교회 중 하나였던 진주 옥봉리교회에 부임, 4년간 교회를 섬겼다.
마산 복음농업실수학교 교장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교육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해방 직후 부산의 군소대학 설립 기성회와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최초 민립대학인 부산대를 세웠다. 46년 5월 급기야 국립 부산대로 인가를 받기에 이른다.
윤인구가 세운 부산대 모습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이었다. 59년 완공된, 당시 대학본관이었던 현재 인문관은 지금 봐도 놀랍다. 한국전쟁 이후 피폐했던 부산에 5층까지 큰 중앙홀을 전면 유리창으로 감싼 건물을 세웠던 것이다. 김 교수는 이 건물에 담겨있는 윤인구의 뜻을 그의 총장 취임사에서 찾아냈다.
“이처럼 비참한 현실의 생에서 그리고 ‘이 절망적인’ 암흑 속에서 참된 인물을 살려내려면 하늘을 열어 광명을 저들의 가슴속으로 던져야 할 것이며 장벽을 헐어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윤인구는 학생들이 이 공간에서 하늘의 광명을 품도록 계획하고 세웠던 것이다.
김 교수는 또 이 건물 캐노피(현관 지붕) 위에서 하늘을 향해 누운 거대한 십자가도 찾아냈다. 김 교수의 안내로 건물을 둘러본 건축가이자 목사인 팀하스의 하형록 회장은 추천사에 이렇게 적었다. “3층쯤 올라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 지붕 위에 십자가 모습이 뚜렷했다. 이것은 우연히 만든 구조적 형태가 아니다. 의도적으로 설계한 십자가 모습이다. 나는 알았다. 윤 총장께서 심은 진실의 비밀을, 그가 감춘 영적인 보물을. 김 교수는 그 숨어있던 보물을 다시 찾아낸 것이다.”
김 교수는 2008년 윤인구를 소개한 다큐멘터리 ‘하늘 열고 광명을’의 제작보고회를 겸해 부흥찬양집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거룩한 세대 기도운동’을 시작했고 전국 기독교수들과 연대해 캠퍼스 선교 운동을 펼치고 있다. 10년간 연구비 신청을 하지 않았고 학생들을 돌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요즘엔 중국과 아프리카 등에서 찾아온 학생들을 가르치며 윤인구의 삶을 통해 희망과 비전을 심어주고 있다.
책 제목은 김 교수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을 읽으며 어쩌면 윤인구가 우리 시대 부흥의 우물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데서 가져왔다. 창세기 26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린 아브라함의 우물을 파서 이삭이 생명을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윤인구의 삶을 알게 된 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역사를 지우실 수 있냐고 하나님께 막 대들었던 적이 있어요. ‘이때를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했어요. 지금 이 시기에 부흥의 우물을 찾도록 설계하신 것이 아닐지….” 19일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김 교수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부산대에는 윤인구 초대총장의 ‘영적 보물’ 있다
입력 2018-06-21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