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혜림] 생명 자기결정권

입력 2018-06-20 04:00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지난 주말 빨래를 널면서 흥얼거린 동요 한 소절. 빨래건조기보다는 햇볕에 말리는 게 익숙한 ‘20세기형 반쪽 주부’다. 예전에 할머니는 이런 날씨를 ‘이불 말리기 좋은 날씨’라고 하셨다. 한낮 햇볕이 뜨거워지면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솜이불을 너셨다. 종종 누런 헝겊뭉치를 정성스레 펴서 옆에 널었다. 할머니 옷이라는데 터무니없이 커보였다. 모양새도 이상했다. 할머니는 “길 떠날 때 입을 옷”이라고 하셨다. 환갑 때 수의를 마련하신 뒤 10여년 동안 손질하셨다. ‘그저 자는 듯 고요히 가게 해주소서’ 혼잣말을 하시면서. 돌아가실 때 바로 그 옷을 입으셨다. 나름대로 죽음을 기다리며 준비하신 셈이다.

지난달 호주의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은 스스로 죽음을 초대했다. 구달은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정맥주사기에 연결된 밸브를 직접 돌렸다.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의 나이는 104세였다. 미국의 경제학자 스콧 니어링은 좀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한 방법으로 생을 마감했다. 1983년 100세를 앞둔 그는 3주간 단식 끝에 세상을 떴다.

구달이나 니어링의 선택은 극단적이다. 그들은 아픈 것도 아니고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나이 들어 기력을 잃자 생을 마감한 것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하지만 100세 시대를 맞은 우리에게 삶의 마무리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갑남을녀들의 희망은 ‘9988234’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삼일 아프다가 죽기’를 바란다. 하지만 팔팔하게 살 수 없다면?

우리나라도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매우 소극적이다. 지난 2월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시행되고 있다. 회복 불능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 즉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칫 생명이 경시될까 우려해 그 절차가 매우 엄격하다.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 ‘웰다잉(Well Dying)’에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 ‘웰빙(Well Being)’이 전제돼야 하지 않을까.

이번 주말에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써야겠다. 그리고 사는 날까지 팔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김혜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