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21일간의 장고(長考) 끝에 내린 결론은 ‘절충’이었다. 철저한 진상조사로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자들을 형사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센 상황에서 자칫 대법원장이 ‘유죄 심증’을 드러내는 꼴이 될 수 있다는 법원 내부의 조언을 수용했다. 적극적인 수사 협조 의지를 표명하면서 우회적으로 수사를 의뢰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김 대법원장은 15일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뒤 퇴근길에서 취재진과 만나 “저는 (수사 등 절차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며 “수사가 진행되면 절차에 따라 성실히 협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온적 결론을 내린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충분히 그런 비판을 받을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재판의 책임을 최종적으로 맡는 대법원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고민의 결과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1년 이상 끌어온 논란이 제 한마디로 하루아침에 가라앉을 거로 생각하진 않는다”며 “국민 여러분과 법원 구성원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소속의 한 부장판사는 15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사법부 구성원 대다수가 원했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도 “강제 수사가 개시되면 (검찰에)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협조하겠다는 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반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김 대법원장의 대국민 담화에 아쉬움을 표한다”면서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하라”고 촉구했다.
법원 내부에선 김 대법원장의 직접 고발을 반대하는 기류가 강했다.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를 촉구할 경우 수사를 진행할 검사는 물론 재판을 담당할 법관에게도 일종의 유죄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장 판사들이 상당수 참여한 법관대표회의에서도 “대법원장 명의의 형사 고발 등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개혁 성향 법관들의 지지가 김 대법원장의 선택에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다.
한편 김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 13명은 담화문 발표 2시간30분 뒤에 재판거래 의혹을 부인하는 입장문을 별도로 냈다. 대법관들은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해 국민에게 혼란을 주는 일이 계속돼선 안 된다”며 “사회 일각에서 대법원 판결에 어떤 의혹이라도 있는 양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해 대법관 모두가 어떠한 의혹도 없다는 견해가 일치됐다”고 밝혔다.
당초 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은 지난 1일과 12일 두 차례 회의를 열었다. 대법관들은 “재판 거래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 달라”고 김 대법원장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이 담화문에서 “(재판거래) 의혹 해소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내자 반박 의견을 낸 것이다.
대법관 13명 중 고영한 대법관 등 7명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댓글 사건 상고심 전원합의체 판결 등에 참여했다. 사법연수원 13기인 고 대법관 등 8명의 대법관은 김 대법원장(연수원 15기)보다 연수원 기수가 높다. 재판거래 의혹으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부 대법관이 김 대법원장을 향해 서운함을 표출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들은 “이와 같은 형태로 의견을 개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의 결단으로 이번 파문이 봉합될지는 불투명하다. 법관 사찰의 대상자였던 차성안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김 대법원장의 형사 고발을 요구했었다. 시민단체의 반발도 이어질 전망이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형사고발 대신 우회적 수사 의뢰… ‘절충’ 택했다
입력 2018-06-16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