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첫 주말, 추자도 섬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눈이 맑았고 똘똘했다. 소년과 나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신양1리 바닷가 버스정류장에서 함께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우리가 있는 이곳을 출발해 섬 구석구석을 돌다 추자항여객선터미널에 이른다. 이 터미널에서 제주시와 목포·완도 등으로 나갈 수 있다.
소년은 2㎞ 남짓 떨어진 묵리 집으로 간다고 했다. “공부를 아주 잘할 것 같다”며 짓궂은 질문을 하자 답을 주저하던 소년은 “못하진 않아요”라고 했다. “1, 2등?”이라고 되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은 버스정류장 맞은편 신양분교에 다닌다. 전 학년 학생수가 10명이다.
1961년 7월 한 신문의 추자도 르포를 보면 ‘한 집에 아이가 7명은 기본이요, 최고 15명까지 있는 집안이 있다’고 전한다. ‘길에 우글거리는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르포 사진은 아낙 셋이 각자 등에 아이를 업었고 그 옆으로 또 다른 아이들이 걷고 있다. 1991년 무렵만 해도 추자도 인구는 4700여명이었다. 지금은 1900명 정도다. 어린이는 추자초교와 소년이 다니는 분교 포함 56명이다.
이 섬 소년 얘기를 하는 것은 추자도 출신 한국유기농업 대부 오재길(1920∼2018·정농회 설립자)과 기독NGO 활동가 오재식(1933∼2013·월드비전 회장 역임) 기독리더 형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오재길은 1931년 여름, 뭍에서 온 방계성(1888∼1949·목사) 전도사를 만난다. 아버지뻘 어른이었다. 방계성은 1920년대 초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부산 초량교회 장로 직분으로 헌신하다 조선장로교 경남노회 전도사에 시취됐다. 그 첫 부임지가 추자도였다.
오재길은 4년제 추자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그 학교 급사로 취직했다. 그런데 그가 방계성이 부임한 신양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자 일본인 훈도(교사)가 이를 못 마땅히 여기고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오재식은 “일본은 교회에 조선인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또 교회가 사람들을 선동해 일본에 대한 불만을 부추길 것으로 보았다”며 “당시 섬에서 영향력깨나 있는 일본인 훈도가 형에게 주먹질을 가할 만큼 악질적으로 굴었다”라고 증언했다.
섬 소년, 뭍의 전도사를 만나다
신양교회는 신양분교 옆 골목 언덕길에 있다. 신양리 마을 어디서 봐도 교회 건물이 눈에 띄었다. 마침 날씨가 좋아 하늘과 바다, 교회가 사진 프레임 속으로 멋지게 들어왔다.
추자도 옛 사진을 보면 조기 파시 때의 신양리는 도시 번화가 못잖게 성시였다. 하지만 지금은 길거리에서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 느릿느릿 걷는 어르신들만 가끔 오갔다. 교회 입구 정겨운 간판 ‘새마을상회’를 신양교회 은퇴장로가 지키고 있는 것이 그나마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물고기가 없으니 사람이 있을 리 없죠. 우리 젊었을 때 그물만 던지면 잡혔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어요. 또 제주까지 1시간이면 배가 닿으니 누가 이곳에 살려고 합니까. 교인들 사정도 비슷하고요.”
한 성도가 추자도의 근황을 두런두런 얘기했다. 추자도에는 이곳 첫 교회인 신양교회 외에도 추광교회 등 3개의 교회가 있다.
이날 신양교회에 들어서니 권사, 집사 세 분이 교육관 아래 사택을 청소하느라 분주했다. 선풍기와 전열기 등의 가전을 사택 앞마당에 내놓고 방 청소에 열심이었다. 한 사람은 창틀에 올라서 먼지를 닦아냈다. 오는 수요예배 때 신임 목사가 부임한다고 했다. 아담한 사택과 편안한 규모의 예배당 풍경은 잊혀진 신앙공동체의 모습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추자도 교회 개척의 시작은 1928년 장로회 전남노회에 참석한 회중에 의해 발의돼 ‘더는 미룰 수 없는 안건’으로 상정되면서다. 그들은 즉석에서 교회 개척을 위한 연보 400원을 모았다. 그 무렵 제주 본도를 포함한 섬선교는 요즘 해외선교에 준하는 사역이었다. 따라서 추자도와 같은 낙도선교는 파송 교단이나 부임 목회자 모두 결단이 필요했다.
방계성은 추자도 선교의 개척자다. 그는 1930∼40년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가결로 영적으로 무너진 와중에 스데반과 같은 자세로 신앙의 양심을 지킨 인물이다. 주기철(1897∼1944·독립운동가) 이기선(1887∼1950·순교자) 목사 등과 동역하며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에 맞선 순교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평안도 선천 미션스쿨에 진학하면서 신앙인이 됐다. 19세 무렵 측량기사가 됐고, 기독청년으로 계몽적 신앙운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전도 대상 청소년들의 머리를 신식으로 잘라주다 향리 어른들의 미움을 사 부산까지 내려와 정착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건착망 회사 서기로 근무하며 신앙생활을 했고 결혼도 했다. 이때 이기선 목사 부흥회가 부산에서 열렸고 이 집회에서 영적 각성을 겪게 된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도 붙들린바 됐기 때문이다.
방계성은 부산에서 문구잡화상 등을 경영하며 사업 수완을 다졌고 섬기던 부산 초량교회 장로가 됐다. 그리고 1926년 주기철 목사가 위임목사로 부임하자 동역한다. 주 목사에게는 첫 목회지였다. 두 사람의 동역으로 초량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이때 주 목사는 방계성에게 사역자가 되도록 권면했다.
1930년 9월 20일자 초량교회 당회록에는 방계성 가족을 전남노회 소속 신양교회로 이명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양교회 담임 목회자로 부임을 위한 조처였다. 직장과 가정이 튼실한 사업가인 큰 교회 장로가 모든 걸 내려놓고 섬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명령 없이 힘든 일이다. 그는 그 험난한 사역지에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이기선 목사의 생애’라는 저서엔 방계성의 신양교회 건축 과정이 서술돼 있다. 뭍과 제주의 중간 지점의 추자도. 그는 오로지 풍선(風船)에 의지해 건축 자재를 육지로부터 실어 날랐다. 섬 주민들은 위험한 일이라며 만류했다. 선원들은 그 위험한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교회를 위한 물자였기 때문 아닌가 하는 구술을 남겼다. 전남노회 연보에 더해 추자도 개척 선교비를 댄 곳은 호남선교의 중심 광주 양림교회 여전도부였다고 한다.
방계성, 신사참배 거부 5년간 옥살이
부임한 방계성은 예수를 알기 위해선 배움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따라서 섬 소년들을 모아 야학을 열고 인재를 기르는 데 힘썼다. 추자도에는 유일한 교육기관이라야 4년제 보통학교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문 성경과 총회 교육부의 교재로 교육목회에 힘썼고 학업 열의가 있는 청소년들에겐 성경통신과를 이수하도록 했다. 훗날 그는 전도방법을 묻는 질문에 “먼저 그 동리에서 똑똑하고 건실한 학생을 얻어서 협조를 얻으라”고 조언했다.
방계성의 추자도교회 목회는 3년간 이어졌다. “섬 목회자가 6남매를 지탱하기에는 너무나 고생이 많았다”고 그의 족질인 방지일(1911∼2014·일제강점기 중국 파송 선교사) 목사가 증언했다. 그는 생전 신양교회를 두어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한편 소년 오재길은 일본인 교사로부터 “교회에 다니려면 급사 일을 그만두라”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그는 급사를 그만둘지언정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형제 많은 집안 가장으로 생계가 막막했으나 신앙을 버릴 순 없었다.
그때 오재길은 추자도를 떠나 주기철 목사와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던 방계성에게 자신의 딱한 사정을 토로한 장문의 편지를 썼다. 방계성은 그를 평양으로 불렀다. 오재길 오재식 형제가 훗날 믿음의 선진이 된 이유는 이처럼 한 목자의 헌신적 교육목회와 사랑의 실천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섬 소년은 묵리의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하나님의 은사가 이 섬 소년에게도 어떻게 주어질지 궁금하다. 버스에서 내린 소년이 내게 손을 흔들더니 집을 향해 뛰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 방계성과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는 우상숭배” 끝까지 저항하다 투옥
추자도 신양교회를 떠난 방계성은 1934년 만주 안동 육도구교회 담임전도사로 부임한다. 여기서도 그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등 열성적 목회를 한다. 그리고 그는 1937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의 권유로 산정현교회 전도사 부임을 위해 육도구교회를 떠나야 했다. 신양교회를 나설 때처럼 육도구교회 성도의 눈물바다를 뒤로해야 했다.
당시 산정현교회는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 등 민족지도자들이 당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주기철과 방계성은 바울과 디모데처럼 기억되는 사역자였다. 주기철은 일제에 저항했고 검속과 출옥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신사참배에 응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며 단호히 반대했다.
주기철이 검속될 때면 방계성이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그리고 이내 방계성마저 연행됐고 교회는 폐쇄됐다. 두 사람은 옥중생활을 같이해야 했다. 일경은 신사참배 반대 배후를 캐물었다. 방계성은 “배후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우상에 절대 절하지 말라고 했다”며 저항했다.
방계성은 5년여를 형무소에 갇혔다 해방과 함께 석방됐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꼭두각시 기독교연맹 가입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다 1949년 12월 27일 공산당에 납치된 후 순교했다. 주기철은 1944년 형무소 수감 중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 이감 후 소천받았다.
▣ 방계성 목사 약력
1888 평북 철산 태생
1903 신천예수학원 입학
1913 부산 이주 건착망 회사 서기
1920∼1922 평양신학교 수학
1926 부산 초량교회 장로
1930∼1933 제주 추자도 신양교회
1931 경남노회 전도사 시취
1934∼1936 만주 안동현 육도구교회
1937∼1949 평양 산정현교회
1940∼1945 평양형무소 수감
1949 목사안수 및 공산당 기독교연맹 가입 거부
1949년 12월 27일 체포 및 순교
추자도(제주)=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한국기독역사여행] 섬 소년 가슴에 심어준 ‘일사각오’ 신앙
입력 2018-06-16 00:00 수정 2018-06-17 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