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이런 장면으로 시작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쓰나미에 휩쓸려 제 수명을 다해버린 피아노를 이리저리 살피고 어루만지는 한 남자. 자꾸만 음이 이탈하는 데도 동요 없이 연주를 이어간다. 다름 아닌 일본의 음악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66)다.
이어지는 행보도 의아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제한구역에 방문하는가 하면 도쿄 총리관저 앞에서 열린 원전 재가동 반대 시위에 참여한다. 동일본대지진 피해자 대피소를 찾아 연주회를 연 것도 그였다. 음악으로나마 위로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사생활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카모토가 자신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감독 스티븐 노무라 시블·14일 개봉·사진) 촬영에 응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큰 재해를 겪은 뒤 변혁의 시기를 맞은 일본의 모습을 저를 통해 기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부제 ‘코다’는 악곡의 결미를 뜻한다.
사카모토는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적 음악가다. 영화 ‘마지막 황제’(1987)의 음악 작업을 맡아 아시아계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건 물론 골든글로브·그래미까지 석권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같은 시대를 초월한 명곡도 탄생시켰다. 그가 배우로 출연하기도 한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의 주제곡이다.
2014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인후암 3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치료에 들어간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무렵, 그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 음악 작업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평소 존경하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감독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러나 2012년부터 5년간 촬영된 이 영화를 보면, 그의 이른 복귀 이유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기력이 쇠한 몸 상태로도 “데뷔 이래 이렇게 오래 쉰 건 처음”이라며 초조해하는 그의 표정에서 음악을 향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열망이 읽힌다.
당초 반핵 활동가로서 사카모토의 목소리를 담으려 했던 영화는 암 판정 이후 방향을 틀어 그의 40년 음악 인생을 두루 훑는다. 2017년 발매된 새 앨범 ‘어싱크(async)’ 작업 모습을 중점적으로 비추는데, 일상 속 모든 순간에 영감을 얻고 소리를 채집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완성시키는 일련의 과정에서 쩌릿한 전율이 전해진다.
원하는 소리를 찾아냈을 때 그의 얼굴 가득 번지는 소년 같은 미소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사카모토의 음악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전시공간 피크닉에서 그의 데뷔 40주년 기념 전시 ‘라이프, 라이프’(∼10월 14일)가 열리고 있다.
권남영 기자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소리를 향한 이 강인한 집념 [리뷰]
입력 2018-06-11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