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7> 최수자 성도

입력 2018-06-09 00:00
파독 간호사 최수자씨(왼쪽 두 번째)가 올 초 독일 본 주님의교회에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있다.
1985년 천주교병원 중환자병동에서 동료 의료인과 함께한 최씨(가운데).
최수자씨(왼쪽)가 남편 홍철표씨와 댄스스포츠를 배우고 있다.
박경란 칼럼니스트
독일 저널리스트 마티나 로젠베르크가 쓴 ‘엄마, 도대체 언제 죽을 건가요?(Mutter, wann stirbst du endlich?)’라는 책이 있다. 로젠베르크는 중풍 걸린 아버지와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돌보다 지나가 버린 청춘에 침울해 했다. 언뜻 자극적인 제목으로 마음이 불편하지만 글쓴이의 고통이 덮쳐온다.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러한 의식을 깨우는 현실적 고뇌가 있다. 하지만 (타향살이인) 우리로서는 부모의 마지막을 동행해 드린 자랑 섞인 변(辯)처럼 들린다. 부모의 존재를 그리워하는 이는 그것을 못내 갈망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렇게 오래도록 머무를 줄 몰랐었기에/깍듯한 인사 없이 떠나왔나 봅니다./그냥, 어디 잠깐 다녀오듯 신이 나서 뻐겨댔지요./어느 날 안타까이 못 뵈옵게 뵐 줄을 몰랐었기에 꿈이 있다고 우쭐대며 떠나왔나 봅니다./일러주신 귀한 말씀 귀에 울려와 낡디 낡은 수첩을 뒤적대지요.”

파독 간호사 최수자(73)씨는 반세기 동안 줄곧 아버지를 향한 시를 썼다. 1967년 독일로 향할 때 고향의 기차역 앞에서 손을 흔들던 아버지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독일 삶의 힘이었다.

“아버지가 가끔 독일로 편지를 보내왔어요. 언젠가 편지에 아버지가 수도승이 되려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연락이 끊어졌어요. 나중에 아버지의 행방을 알기 위해 신문에 내고 흥신소를 통해 수소문했지만 지금껏 아버지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에게 아버지는 유일한 혈육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등졌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목사님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외증조할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어머니도 신앙인이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지만 어머니가 떠난 후 교회도 잊었다. 아버지는 그가 11세 되던 해 재혼했고, 딸이 독일로 떠난 후 홀연히 집을 나섰다.

당시 그는 부산 간호학교(현 부산대 간호학과) 졸업생인 친구 4명과 함께 파독 간호사에 지원했다. 60년대는 전쟁 후 미국 자유주의 물결이 넘실거릴 때였다. 그들 모두 강요된 결혼에 반기를 든 생기발랄한 청춘이었다. 5명 중 최씨만 유일하게 독일로 떠났다. 막상 독일행을 결정하자 새어머니의 반발이 심했다.

“새어머니는 ‘가난하고 못사는 애들이 독일에 간다는데 네가 독일 가면 계모라서 내쫓은 거라고 할 거 아니냐’면서, 그러려면 시집이나 가라고 하더군요. 그때 아버지가 3년만 경험하고 돌아오게 하자고 새어머니를 설득했어요.”

그가 처음 도착한 보쿰(Bochum)은 주로 천주교 재단이 세운 병원이 많았다. 그는 병원 입사서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었다. 매달 종교세를 납부하자, 독일교회에서 행사가 있으면 초대를 했다. 이국의 삶은 외롭고 고달팠다. 독일 병원에서는 청소와 환자들 씻기는 일까지 해야 했다. 언어와 문화, 고된 업무 속에서 지쳐갔다. 가끔씩 발을 디딘 독일교회에서 ‘Vater Gott(아버지 하나님)’을 나지막이 부를 때면 희미한 평안이 느껴졌다. 한국의 아버지가 그리워서일 거라고 되뇌었다. 아버지가 보고프면 시를 썼다. 노벨 문학상을 꿈꿨던 풋내기 소녀시절이 추억처럼 떠올랐다.

‘오늘은 여기 계절조차 등 뒤로 돌아앉은 곳에서/못다 채운 악장에 가슴 찢기며/그리움에 멍울진 노래로 산다.’(2009년 헤르네에서)

70년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 홍철표씨는 이승만정권 시절 대학에 다니며 시위하다 감옥에 끌려갔다 풀려난 후 우여곡절 끝에 파독 광부로 왔다. 남편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을 해 왔다. 결혼식에는 독일인 목사가 주례를 섰다.

“결혼할 때 세례를 받았어요. 결혼식에는 한인교회 합창단이 와서 찬양까지 해줬지요. 하지만 그 이후로도 둘 다 교회에 잘 나가지 않았어요. 그저 성실하고 행복한 가정이 최고인 줄 알았죠.”

부부는 실과 바늘처럼 늘 함께했고, 그림자처럼 친근했다. 남편은 김치를 담갔고 아내는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먹구름이 다가온 건 순식간이었다. 남편에게 심장마비와 뇌졸중이 찾아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 성도의 척추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마음속에 ‘나름대로 착실하게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고생하나’라는 원망이 많았다. 고통이 잠식하니 무작정 하나님을 찾았다. 시간은 아주 멀리 돌고 돌아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만난 ‘아버지 하나님’ 그분이었다. 그때까지 지역공동체의 일환으로 갔던 교회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 마음 한쪽에 손님처럼 어색했던 ‘아버지 하나님’이 온 마음의 주인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때까지 제일 부러운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이들이었어요. 주변에 보니 그런 사람들은 고난이 와도 끄떡하지 않더군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는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입니다. 황혼의 문턱에서야 참된 행복을 알게 되네요.”

이제는 영적 아버지를 위한 시를 쓰고 싶다는 최수자씨. 그를 보며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는 요즘 영혼의 방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이제야 그의 시에 영혼이 담긴다.

‘이제야 색 낡은 종잇장에 나열되는 사연은 언어를 잊어먹은 문자 이전의 심온이외다.’(독일 헤르네에서)

박경란<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