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성장 권위자의 쓴소리… 이상헌 ILO 국장 “최저임금 인상만으론 안돼”

입력 2018-06-07 05:06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이 5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제공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소득주도성장 정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려면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 해결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중소기업 간 공정거래, 혁신성장, 저소득층을 위한 소득지원정책 강화 없이 최저임금 인상만으로 소득주도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설명이다. 문재인정부가 ‘소득 증가→소비 증가→투자 활성화→일자리·소득 증가’의 선순환을 달성하려면 그동안 펼친 정책을 점검해야 한다는 경고다.

이 국장은 5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ILO 본부 사무실에서 고용노동부 출입기자단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소득주도성장은 소득분배만 개선해서 성장하자는 게 아니다”며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선 대·중소기업 간 공정경제를 지목했다. 이 국장은 “유독 한국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가 많이 벌어져 있다. 이건 한국 중소기업이 부실해서 그런 게 아니다”고 꼬집었다. 이어 “대기업이 ‘가격 후려치기’ 등 불공정 거래로 중소기업을 쥐어짜면서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대기업 생산성은 오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최근 논란인 ‘최저임금 인상’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했다. 이 국장은 “대·중소기업 간 분배 문제가 방치되면서 중소기업의 지불능력은 점점 떨어진다. 중소기업 사정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저임금을 올리려다 보니 문제가 꼬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정부가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의 한 축으로 제시했던 ‘공정경제 확립’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묻혀 공정경제 관련 정책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국장은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곤란하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의 실제 효과를 분석하는 건 노동경제학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미국과 헝가리 사례에 한국을 적용해 분석하는 것은 어이없는 실수”라고 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KDI는 해외 사례를 바탕으로 향후 최저임금이 15% 이상 지속적으로 오르면 고용 감소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며 최저임금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이 국장은 공정경제와 혁신성장, 소득지원정책 등에서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최저임금을 올리면서 혼란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연구·개발(R&D)을 통해 전반적 생산성을 강화하는 공급측면 개혁이 뒤따라줘야 하고, 저소득층 근로장려세제(EITC) 등을 통한 소득지원정책도 늘려야 한다고 봤다. 그는 “다른 우선순위 정책들이 먼저 배치가 된 다음에 최저임금 인상이 결정됐어야 하는데, 경제정책 쪽에서 준비가 미흡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릴 것으로 보인다. 최근 소득분배지표는 악화되고 있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소득 1분위(하위 20%) 가구의 소득이 8.0% 감소한 반면 5분위(상위 20%) 가구의 소득은 9.3% 올랐다. 소득주도성장이 핵심목표인 소득분배 개선에 실패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청와대는 유리한 일부 지표만 골라 분배가 개선되고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세종=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