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유다만이 배신자인가

입력 2018-06-05 00:00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악한 인물로 꼽히는 사람 중 한 명이 배신자 가룟 유다다. 그런데 이러한 유다를 변명해주고 오히려 그를 정당화하는 흐름들이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는 잡지는 2006년 가룟 유다에 대한 자료들을 발표하면서 유다가 실제 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700년 전 고대문서를 통해 가룟 유다야말로 예수님의 가장 진정한 제자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예수께서 유다에게 자신을 배신해 달라고 부탁함으로써 유다가 원하지 않았지만 그 책임을 지게 되었으므로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라는 ‘유다복음’의 주장을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다복음은 AD 180년 이전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당시에도 위조문서로 취급되던 것이다.

문학 예술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있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에서 주인공의 이미지를 통해 유다의 주된 이미지를 배신자가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뇌하는 사람으로 다뤘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도 유다는 원치 않는 일을 운명적으로 강요받은 인물로 묘사됐다.

왜 이렇게 성경과 반대되는 흐름에 역사가들과 문화가들이 동조할까. 유다의 배신을 합리화함으로써 자신 안에 있는 배신을 합리화하고 싶은 게 아닐까. 역사상 가장 악하고 안타까운 배신이 가장 의로운 행동으로 합리화된다면 그 어떤 배신도 배신이 될 수 없고, 그 어떤 죄도 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유다의 배신은 도무지 변명할 수 없는 죄다. 메시아에 대한 배반이 성경에 예언되었다고 해서 유다는 그 예언의 희생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자유로운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도 죄를 짓는 것을 예정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악한 일을 하도록 충동질하지 않는다. 죄는 자신의 선택으로 지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하신 바를 이루시며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고 우리는 믿는다.

유다는 사탄에게 문을 열어 놓고 사탄이 들어오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사탄이 유다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유다가 사탄을 자기 속에 불러들인 것이다. 사탄은 양심의 소리를 마비시키고 악을 행하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빼앗아 버리고 이성의 빛을 어둡게 하고 부끄러움을 파괴해 담대하게 악을 행하게 한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이상이 깨져버렸기 때문에 그 허탈감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어떤 정치적 신념을 이루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희생적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자신의 조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는 독일이 부강하게 되는 것보다 올바른 나라가 되기를 더 소망했다. 유다의 배신은 정반대였다. 유다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택했다. 유다는 ‘원치 않는 악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한 악인’이었다. 악역을 맡은 사람은 악역을 한 것에 대한 슬픔이 있지만 그에게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희생자가 아니라 불행한 선택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유다를 미화하는 흐름에는 반대하면서도 추구하는 목적은 동일한 흐름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비판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유다의 모습은 합리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직접 받고도 사람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본다.

하물며 허물 많은 죄인들과 함께 제자훈련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으며 얼마나 쉽게 멸망의 자식이 될 수 있겠는가. 예수님 가까이 있던 제자가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비극을 경험했다면 우리 또한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심각한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한국교회 곳곳에 유다의 배신 징후들이 나타난다. 겉으로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내면에는 돈이 이유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유다의 배신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유다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서로 정죄하기에 앞서 자신 안에 있는 유다의 배신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재훈 (온누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