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의 뿌리를 찾아서] <4·끝> 스위스에서 만난 ‘정교분리의 전통’

입력 2018-06-05 00:00
침례교 순례단원들이 스위스 취리히 리마트 강변에 설치된 펠릭스 만츠 수장 기록을 담은 돌판 앞에서 유관재 목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가 첫 번째 침례교회를 세운 로저 윌리엄스의 부조. 스위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에 있다.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 16세기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울리히 츠빙글리가 사역하던 곳이다.
교회 외벽에 있는 츠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의 부조.
오늘날 한국의 침례교회는 이른바 국교회 제도에 맞서는 ‘자유교회(Free Church)’ 전통 위에 서 있다. 종교개혁 당시 영국의 성공회, 독일의 루터교회 등 대다수 유럽 교회가 택했던 것과 달리 자유교회는 세속 정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강조했던 이들을 칭한다. 이러한 전통은 16세기 스위스에서 일어난 성서적 아나뱁티스트(Anabaptist·재세례파)들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결과다. 유관재 성광교회 목사와 순례단은 지난 4월 25일부터 이틀간 스위스 취리히와 제네바를 찾아 아나뱁티스트들의 발자취를 찾아봤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정신을 미국으로 건너가 꽃피운 로저 윌리엄스(1603∼1683)의 흔적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순교한 펠릭스 만츠

순례단 일동은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로 향했다.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와 그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가 사역했던 교회로 당시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다.

성상을 반대했던 전통에 따라 지금도 화려한 장식이나 성상 없이 단순하면서도 경건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교회 외벽 한쪽에 부조 형태로 붙어있는 불링거의 조각상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 스위스에서는 성상 문제와 화체설, 연옥 등의 주요 교리와 유아세례 문제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펼쳐졌다.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츠, 게오르게 블라우락 같은 츠빙글리의 제자들은 유아세례가 예수 믿는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여야 한다는 신약성경에 위배된다며 고백하는 자들에게 세례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이에 격분했고 제자들은 만츠의 집에서 진짜 세례를 베풀면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스위스 형제단’이라 불리는 이들은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히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결국 취리히 주정부는 당시 재세례를 주장하는 이들을 잡아들이도록 명령했고, 만츠가 첫 번째로 사형대에 올랐다. 취리히 시내를 가로지르는 리마트강에서 1527년 1월 5일 만츠는 나무막대기에 손과 발을 한꺼번에 묶인 채 강으로 던져졌다.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프로테스탄트가 순교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유 목사와 순례단이 찾아간 리마트 강변엔 잠시 휴식을 가지기 위해 나온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편안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유유히 흐르고 잘 정돈된 강변에선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강변 한쪽에 새겨진,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돌판 하나를 찾았다.

유 목사와 순례단은 이곳에 서서 만츠와 이들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유 목사는 “이들은 무엇보다 재침례를 강조하면서 세속정부를 강하게 부정했기 때문에 강력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들의 개혁운동은 신약성서에 제시돼 있는 교회, 즉 세속권력과 결탁하기 이전의 순수했던 신자들의 교회를 회복하고 16세기에 이를 다시금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로마 가톨릭은 물론 당시 스위스의 개혁교회 양쪽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이들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교회 공동체로 발전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덧입혀졌고, 박해를 통해 2000여명의 순교자를 내면서 서서히 세력을 잃었다. 그나마 박해가 덜했던 모라비아의 후터라이트 공동체, 네덜란드의 메노나이트 처치, 미국으로 건너가 자리 잡은 아미시 공동체 등을 통해 명맥이 이어졌다. 유 목사는 “아나뱁티스트는 믿는 자들의 세례라는 전통과 정교분리 원칙 이외에 다른 부분에서는 오늘날 침례교회와 많이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며 “침례교회에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순례일정을 함께한 부여칠산교회 조용호 목사는 “스위스는 아름다운 풍경의 나라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보니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순교의 피가 흐르는 거룩한 땅이었다”며 “당시 수장됐던 만츠를 통해 지금까지도 이어져온 침례교 전통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미국 첫 침례교회 설립자 로저 윌리엄스

유 목사와 순례단원들은 제네바 구시가지, 바스티옹 공원을 찾았다. 길이 100m, 높이 10m 장벽에 거대한 종교개혁가들의 부조가 이들을 맞았다. 칼뱅과 파렐, 베자,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뿌리가 된 존 낙스 네 명의 부조상이 유명하다. 유 목사와 순례단원들은 네 명의 부조상 오른쪽 옆에 서 있는 조각 앞에 섰다. 윌리엄스가 그 조각의 주인공이다.

윌리엄스는 17세기 영국에서 국교회에 맞서 분리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국교도였던 윌리엄스는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엘리트였으나 분리주의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1631년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갔지만 보스턴 교회 교사직을 거절했다. 당시 미국 교회들이 윌리엄스의 눈에는 분리주의 노선의 교회로 보기엔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대신 보스턴 동북쪽 세일럼의 분리주의자들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고, 플리머스 교회 등에서 설교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세속 권력과 교회가 결합한 형태의 ‘회중교회’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었다.

결국 그는 1639년 매사추세츠주 관할지가 아니었던 프라비던스에서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윌리엄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교회는 국가로부터 엄격히 분리돼야 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유 목사는 “당시 윌리엄스는 교회와 세속국가가 저마다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다”며 “이는 이후 미합중국의 연방헌법에 정교분리 원칙으로 새겨졌다”고 설명했다. 유 목사는 “침례교회는 이처럼 세속 권력과 분리된 신앙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교단과 달리 능동적인 신앙을 갖게 됐다”며 “또 복음적이고 성경 중심적이며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취리히, 제네바(스위스)=글·사진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