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우거진 인천 강화군의 한 콩나물 공장. 위생복을 입은 발달장애인들이 콩나물을 재배하고 기구들을 씻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오전의 노동을 끝내고 식탁에 오른 음식은 콩비지와 장조림, 나물. 웃고 떠들며 즐겁게 식사하는 장애인들 사이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김성수(89) 대한성공회 주교가 허름한 작업 조끼를 입은 채 함께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28일 오전 찾아간 강화도우리마을(원장 이대성 성공회 신부)은 발달장애인 85명이 함께 이룬 공동체다. 여느 장애인 직업재활시설과 다른 점은 장애인이 최저임금 이상의 수익을 거두며 주거가 해결되고 동아리 활동 등 문화생활을 함께 누린다는 점이다. 더욱이 주일에는 경건한 성찬례가 드려진다. 노인과 장애인의 주거와 노동, 예배가 함께 이뤄지는 독일 디아코니아(‘봉사’를 뜻하는 헬라어) 마을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이 재배한 콩나물은 풀무원, 아이쿱생협 등 대기업을 통해 우리네 가정의 식탁에 오른다. 하루 100t의 물을 써 2t의 콩나물이 생산되며 위생과 품질이 좋다고 정평이 나 있다.
공장 건너편 작업실에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20대에서부터 50대까지 장애인 서른 명이 음악을 들으며 멀티탭과 두꺼비집에 들어갈 부품을 조립하고 있었다. 부품이 떨어질 때면 자유롭게 오가며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후엔 넓은 정원에서 산책하거나 담소를 나누며 한가로이 여유를 즐겼다. 김 주교와 마주칠 때면 동네 할아버지와 같이 격의 없이 대했다. 우리마을 설립자인 김 주교는 수발드는 이 한 명 없이 매일 이곳에서 장애인과 함께 지낸다.
이날은 모두가 함께 모여 찬송가와 가요 부르기를 연습했다. 악기를 다루고 게이트볼과 탁구를 하고 연극을 관람하는 등 매일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이상헌(55)씨는 “근처 야구장(SK 와이번스 2군 경기장)에서 야구를 구경할 때가 제일 즐겁다”며 “친구들과 함께 가족같이 지내며 콩나물을 키우고 축구도 하니 행복하다”고 말했다.
우리마을 건물은 정원을 동그랗게 둘러싼 형태로 지어졌다. 아기를 감싸 안은 어머니의 품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건물 절반은 기숙사, 나머지 절반은 작업실과 사무실로 사용한다. 원목으로 마감된 기숙사 공간은 호텔처럼 넓고 쾌적하다. 탁구대와 러닝머신 등 운동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우리마을 인근에는 장애인이 4명씩 사는 그룹홈 4곳과 서른 명이 함께 거주하는 ‘요한의 집’이 있다. 자기 집에서 출퇴근 버스를 타고 통근하는 장애인도 여럿 된다.
김 주교가 2000년 우리마을을 세울 때 지역주민 중 장애인 시설이 들어선다며 반대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18년이 지난 지금 장애인은 이웃을 섬기고 있었다. 노동으로 번 소중한 돈 몇 천원씩을 주일 성찬례 때 봉헌해 지역 내 대안학교 장학금과 캄보디아 선교 후원금 등을 위해 쓴다.
장애인들은 지역 어르신을 초대해 직접 재배한 콩나물과 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정원에는 후원자들에게 선물할 고구마를 심었다. 이대성 신부는 “하나님 형상대로 빚어진 장애인들이 이웃과 함께 조금도 차별 없이 서로를 섬기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마을 발달장애인 상당수는 어느덧 50대를 맞이하고 있다. 조기 노화를 겪기에 다른 노인 시설로 갈 법하지만 나이와 장애에 따른 차별이 심해 꺼린다고 한다. 그렇다고 장애인 시설로 입주한다면 노인전문요양시설의 법적 기준(6.6㎡) 절반인 3.3㎡라는 좁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할 형편이다. 이 신부는 “법과 시설은 노인과 장애인을 따로 구별해 놓고 있다”며 “노인 장애인을 위한 전문거주시설을 만드는 게 우리마을의 꿈”이라고 말했다.
▒강화도우리마을 세우고 ‘촌장’ 맡아 돕는 김성수 주교
“요람에서 무덤까지 장애인의 길 만드는 게 꿈”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나이 들고 있습니다.”
28일 인천 강화군 강화도우리마을에서 만난 김성수(89) 대한성공회 주교는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정정해 보였다. 1974년 발달장애인 교육을 위한 성베드로학교, 2000년 직업·주거 공동체인 우리마을을 설립한 김 주교는 장애노인 전문거주시설 설립을 꿈꾸고 있었다.
김 주교는 성공회의 큰 어른이다. 87년 6월 10일 서울시청 앞 성공회 성당에서 ‘4·13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해 6·10국민대회의 서막을 열었다.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고문, 성공회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음에도 그에게서 권위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애인과 매일 함께 식사하고 직접 잔반을 처리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강화도에 우리마을을 주셔서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밥 먹고 지내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했다. 그는 “할아버지 냄새나니 오지 말라 하는 이가 없으니 이렇게 행복한 할아버지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 주교는 ‘촌장’이라고 적힌 모자를 머리에 써 보였다. 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장애인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모자만 쓰면 모두가 그를 촌장 할아버지로 알아봐 주니 반갑다고 한다.
다양한 사역을 함에 있어 먼저 나서서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선배 주교가 성베드로학교를 맡겨서 그 일을 시작했고 그들이 졸업해 갈 곳이 없어지자 선친으로부터 받은 땅을 기증해 우리마을을 설립했다. 이들이 50대가 되자 그나마 남아있던 땅을 장애인노인시설 건립을 위해 기증했다.
김 주교는 은퇴하고 나니 늦게 일어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탁자에는 다양한 신문과 책이 놓여있었다. “발달장애인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길을 하나 만들어 놓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들의 부모들이 ‘내가 너보다 일찍 죽어도 되겠구나’라며 안심하게 된다면 예수님 제자처럼 좋은 일을 하는 것 아닙니까. 보잘것없는 씨앗이 큰 나무가 돼 그늘이 지면 많은 이들이 찾아올 겁니다.”
강화=글·사진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현장] 장애인들 하나돼 일·휴식 그리고 예배… 웃음꽃 피어나는 삶터
입력 2018-05-30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