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세상을 사랑했다.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는 말에서 ‘파리’를 빼고 ‘독일’을 집어넣었다. 그만큼 삶에 냉철하게 맞섰다.
1969년 노미자(75) 권사는 세 살 딸을 남겨두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독일에서 보낸 파독 간호사 친구의 편지 때문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답답해졌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짐을 꾸렸다. 당시 여성의 이혼 요구는 사회통념에 대항한 테러 행위였다. 하늘 같던 친정아버지의 설득도 소용없었다. 그는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것은 내면 깊숙한 불안이었다고 후일 그는 고백했다.
그는 정치가를 꿈꾼 소녀였다. 원래 집안 대대로 부유했다. ‘만석꾼 노 면장’이 바로 노 권사의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행복은 저편으로 사라졌다. 당시 3만여명이 참여한 집회에서 주동자 73명 중 한 명이 광주고보 학생회장이던 아버지 노병주 선생이었다.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할아버지는 한 번도 따뜻한 아랫목에 자리를 누우신 적이 없었어요. 추운 겨울에도 마루에서 주무시며 아들을 기다렸다고 해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송충이에 물린 독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문 탓에 출옥 후 몸을 가누지 못한 아버지는 78년 돌아가실 때까지 별다른 일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많던 재산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노 권사가 어깨에 화상을 당하자, 할머니는 “여자가 무슨 정치냐”며 간호학교 입학을 권했다. 생계도 이유였다.
그는 조각난 꿈을 좇아 방황을 거듭했다. 면사무소 직원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보건소 결핵관리요원으로 전전하다 결혼도 했다.
“딸을 낳고 얼마 안 가 좌골신경통이 생겼어요. 이웃사람들이 ‘새댁이 병신이 될 것’이라고 수근거렸죠. 시골에서 아버지가 아픈 몸으로 올라와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녔지요. 그때 날 전도하려던 여 전도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줬어요. 그날 10분 정도 숨이 멎었는데 강을 건너려는 꿈을 꾸다 깨어났어요.”
깨어난 뒤 그는 기적처럼 건강해졌다. 여 전도사님은 기도응답이라 반겼지만, 노 권사는 그때까지도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했다.
독일에 온 뒤 몇 년 지나 한국 친정에서 딸을 데리고 왔다. 그는 병원 근무와 야간 김나지움 진학, 육아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았다. 삶의 고단함을 거센 열정으로 담금질했다. 어느새 그는 프랑크푸르트 종합병원 이비인후과 수간호사로, 능력 있는 간호사가 돼 있었다. 당시 독일 의학협회 선정으로 의사들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가족을 수술하고 진료하기도 했다.
그의 리더십은 한인사회에서 발휘됐다. 85년 재독 한인간호협회를 발족해 발기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세상에 주파수를 고정할수록 공허했다. 내면에 스산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러던 중 한국의 가족에게 일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를 통해 가족들이 하나님을 알아 가게 된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울로 이사한 후 교회에 출석했다.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제사 지내던 어머니가 하나님을 알게 되더니 조상의 위패를 모두 태우고 전도에만 열을 올렸어요. 제가 한국에 왔을 때 어머니가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길래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95년 조카가 군대 제대 후 복학 전에 독일에서 1년간 생활할 때였다. 조카의 여행가방 안에는 어머니가 보낸 편지가 들어있었다.
“미자야. 진수를 데리고 꼭 교회를 가거라. 너는 그동안 사회일 많이 했으니, 이제는 전도하며 교회봉사를 해라. 조카는 노래를 잘하니 성가대 봉사를 하고 너는 꽃꽂이를 잘하니 강대상 꽃꽂이를 맡아라.”
구구절절한 어머니의 편지는 마치 유언처럼 꽂혔다. 조카는 독일에서 술과 담배를 끊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갔고, 노 권사의 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노 권사는 그때까지도(그의 말에 따르면) ‘발바닥 신자’에 불과했다.
그가 하나님을 느낀 것은 98년 어머니의 임종 때였다.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곳은 영안실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천사가 보였어요. 그때 천국이 있다고 믿게 됐지요. 평안이 찾아왔어요.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지요.”
어머니의 성경책 속에는 유서가 들어 있었다.
“온 가족 모두 하나님을 믿고 천국에서 만나자. 처음도 전도요, 마지막도 전도다”는 어머니의 메시지였다.
노 권사는 독일에 돌아와 새벽기도를 드리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 열정적인 제자의 삶을 살고 있다. 어머니의 부탁처럼 매주 꽃꽂이로 봉사하고 성찬위원으로 활동한다.
그의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다. 2015년부터 교육부 프로젝트인 대구보건대의 해외 청년대학생 독일취업 자문교수직을 맡고 있다. 현재 보건대 출신 치위생사 9명이 독일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학생들이 독일에 오면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후 주일날 교회로 인도한다.
12년째 프랑크푸르트 한국정원을 관리봉사하고, 재독 한인간호단체에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피스 메이커’를 자처한다. 재독 동포사회의 어머니로 전도에 분주한 요즘, 그의 인생시계는 자꾸만 거꾸로 간다. 마음의 주파수를 그분께 고정하니, 열정의 뒤쪽에 꿈틀대던 공허가 기쁨이 된 것이다.
박경란<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
[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6> 노미자 권사
입력 2018-05-2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