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배제와 포용

입력 2018-05-25 00:00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70년간 지속된 냉전이 마침내 종식되는 듯했다. 그러나 유독 한반도에선 이데올로기 대립이 30년 가까이 연장되면서 남북 갈등의 해법을 좀처럼 찾기 어려워 보였다. 다행히 최근 남북 정상의 극적인 만남으로 한반도는 새로운 해빙 국면을 맞고 있다. 급변하는 한반도 상황을 지켜보면서 마음에 계속 떠오른 신학자가 있었는데 크로아티아의 ‘미로슬라브 볼프’였다. 이 시점에서 이뤄진 그의 방한은 시의적절한 일이다.

볼프라는 신학자를 처음 소개받은 것은 2001년 미국의 ‘9·11사태’ 직후였다. 그는 냉전 종식과 함께 해묵은 종족 갈등이 불거진 구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그의 대표작은 인종 청소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분별과 반응에 관한 실존적 고뇌를 담은 ‘배제와 포용’이다.

9·11 직후 미국을 비롯한 온 세상이 이슬람의 테러리즘에 깊은 분노와 노골적 증오를 표출하던 때에 교회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했는가. 폭력과 살육이 자행되던 크로아티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옳았는가.

장기간 지속된 남북 분단의 대립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한가.

죄의 결과로 고통받는 이 세상의 현저한 특징은 ‘타자(他者)의 배제’라 할 수 있다. 다름을 틀림이라 표현하는 우리말에도 그런 편견이 배어 있다. 죄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고 그 결과 이웃과의 관계가 깨지게 됐다.

창세기 3장의 원천적 타락이 11장에 나온 바벨탑 사건을 유발한 것이다. 인류 평화의 문제를 단순히 국가 간 협상으로 풀기 어려운 이유는 그 뿌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독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들도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두려움과 타자에 대한 분노에 근거한 편협성이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를 양산하는 시대다. 볼프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배제라는 것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그분의 원수였을 때, 즉 우리를 내치시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보듬으셨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타자를 품는 건 정말 어렵고 동료의 따돌림마저 감수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며 우리를 포용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이었다. 배제는 쉽지만 포용은 대가 지불을 요구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조차 포용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악의 축’ 북한과 공산주의자,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자, 하나님을 부인하고 복음을 조롱하는 반기독교 세력, 실정법과 사회 규범을 어긴 흉악범, 그리고 현대 교회의 ‘뜨거운 감자’ 성소수자 등 보듬기 어려워 보이는 대상을 배제하는 건 괜찮은가. 그들을 포용하는 게 맞는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볼프는 포용을 자기 안에 타자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로 비유한다. 타자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조정하는 일이 타자를 정죄하는 일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와 ‘그들’ 자아, 타자라는 차별이 존재하기 전에 인간과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여러 인종이 아닌 한 인류를 만드셨다.

신분 또는 행실과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존재다. 비판하거나 정죄하기 전에 먼저 존중해야 할 존재다. 자본주의자로서 공산주의자를 만나기 전에, 기독교인으로서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를 만나기 전에, 선교사로서 미전도종족을 만나기 전에, 준법 시민으로서 범죄자를 만나기 전에, 보통 사람으로서 성소수자를 만나기 전에, 먼저 인간과 인간이 만나야 한다. 그래야 관계와 소통,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스도도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인간들을 만나주셨다.

정민영 (전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