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구 인수봉로. 북한산 기슭인 이 길거리에서 붉은색 벽돌 단층주택이 눈에 띄었다. 방 3개가 있는 99.2㎡(33평) 넓이의 집은 전형적인 1970년대 중반에 지어진 주택을 연상시켰다. 앞마당 목련나무와 감나무, 살구나무는 이 집의 오랜 역사를 알리고 있었다.
21일 이 집을 찾았을 때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유물작업 팀원들이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가 생전 사용한 책장과 피아노, 액자 등을 집안에 들여놓고 색을 칠하고 있었다. 문 목사의 조카인 문영미 통일의집 이사는 “전문가들이 문 목사가 사용한 가구 등을 정성껏 보존하고 관리했다”고 귀띔했다.
㈔통일의집(이사장 최찬환)은 평생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문 목사의 자택을 다음달 1일 박물관으로 개조해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이름은 ‘문익환 통일의 집’ 박물관. 이 프로젝트를 위해 2015년부터 기금조성 운동을 벌였다.
이 가옥은 60년대 당시 정부가 관사용으로 지은 주택 중 하나다. 문 목사는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던 70년부터 이곳에서 생활했다. 94년 문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 박용길 장로는 ‘통일의 집’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집을 일반에 공개했다. 하지만 박 장로가 별세한 2011년 이후 방치되다시피 했다. 박물관으로 개관되는 가옥은 문 목사의 마지막 활동기였던 90년대를 재현한다.
문 목사의 딸인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은 “어머니는 이 집이 통일을 위해 토론하고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되길 바라셨다”면서 “아버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뜻 깊은 일을 하기 위해 박물관을 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박물관에는 문 목사의 편지와 책 수의복 성명서 시집 등 유품 2만5000여점이 전시된다. 세 개의 방은 세 개의 콘셉트로 꾸며진다.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성장기를 다룬 방, 문 목사가 가정과 교회 이웃을 돌봤던 시간을 추억하는 방, 그의 민주화·통일 운동을 다룬 방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거실은 사람들이 토론하고 교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문 관장은 “아버지는 평소 자신의 생각을 편지로 표현하셨다. 10년 이상 수감 중일 때도 가족과 동료 신학자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몇 천 통이나 된다”고 했다. 딸이 회고하는 문 목사는 따뜻하고 섬세한 시인이자 신학자, 목회자였다. 문 관장은 “아버지의 방북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과격하고 진보적인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따뜻하신 분”이라며 “아픔이 있는 곳엔 늘 달려가 위로하고 대신 싸우기도 했다. 노동자와 철거민 등 위로가 필요한 분들과 함께 한 흔적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박물관이 통일운동의 씨앗이 되길 기대했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통일운동의 흔적을 보며 일상에서 ‘작은 통일’을 이뤄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문 관장은 “아버지는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한 마음이 돼야 통일이 된다고 하셨다”며 “일상에서 나와 불편한 혹은 적대적인 관계의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작은 통일운동”이라고 했다.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문 목사는 55년부터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교수와 한빛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청년노동자 전태일과 장준하의 죽음을 계기로 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작성하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평소 민주화와 통일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던 그는 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해 ‘4·2남북공동성명’ 합의를 이끌어냈다. 76년 첫 구속 이후 6차례 11년 3개월 동안이나 옥고를 치렀다. 94년 1월 18일 77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이 집에서 숨을 거뒀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사진=신현가 인턴기자
[현장] 문익환 목사 통일의 꿈을 담은 집
입력 2018-05-23 00:01 수정 2018-05-23 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