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5통.
윤석인(46)씨 가족이 지난 5년에 걸쳐 번역한 편지 숫자다. 그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국제어린이양육기구 한국컴패션(대표 서정인 목사) 후원자들에게 전해지는 세계 각지의 감사편지를 번역하고 있다. 날 수로 따지면 하루에 2∼3통씩 번역한 셈인데, 한 주도 거르지 않으면서 감사 편지를 번역한 이들 가정에 찾아온 건 감사와 사랑이었다.
프로그래머인 윤씨는 금요일 저녁이면 컴퓨터를 켠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3∼4시간 편지를 번역하고 있으면 아내와 첫째 아들도 노트북을 켜고 곁에 앉는다. 22일 전화로 만난 윤씨는 “혹여 교회 수련회가 있어 시간을 마련하기 힘들 때면 그 전날 밤을 새워서라도 한 주 25통 이상은 번역하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서울신광교회(유순종 목사)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 중인 윤씨는 2012년 제자들과 함께 컴패션을 통해 에티오피아 어린이를 후원하게 됐다. 직장에서 해외 고객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일이 늘어나던 때였는데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그는 이왕이면 사람 돕는 일을 하고자 2013년부터 번역 봉사를 시작했다.
가족들은 주말마다 책상에 앉아 번역하는 윤씨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몇 개월 하다 그만둘 줄 알았던 봉사활동이 이어지자 윤씨 부인 이영주(46)씨가 거들기 시작했다. 그때가 2015년이었다. 부부는 어려운 영어단어를 서로 묻고 감동적인 편지 내용을 함께 나누며 보람을 느꼈다.
첫째 아들인 윤여민(18)군까지 번역 봉사에 동참한건 이듬해부터였다. 부모의 강요는 없었다. 윤씨 부부가 함께 번역하면서 느끼는 보람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큰 동기부여가 됐다. 평소 동생들에게 장난감만 사줘도 질투했던 윤군이었지만 작은 것에도 감사해 하는 편지 내용을 읽어가면서 뭔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아이티 지진을 겪었던 아이의 편지가 기억에 남아요. 지진으로 가족을 잃었는데도 하나님이 주신 삶을 열심히 살아가겠다며 기도를 요청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어요.”
윤씨는 아이들의 편지 상당수가 일상의 소소함을 후원자에게 전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이라고 소개했다. 후원자로부터 받은 학용품을 학교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등을 설명하는 모습이 마치 하나님께 정성스레 기도하는 모습처럼 다가왔다고 했다. 지금까지 25개국에서 보내온 편지를 번역하며 꼬불꼬불한 글씨를 알아보느라 눈을 찡그릴 때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희망을 건네준다는 보람이 번역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윤씨네 가정은 좀처럼 다투는 일이 없다고 한다. 어려움에도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아이들의 4600여개 사연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됐기 때문이다. 윤씨는 “이 땅에 소망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이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소중한 일”이라며 “가난한 아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꿀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뭉클한 사연 옮기다 보면 어느새 감사와 사랑 넘쳐요”
입력 2018-05-23 00:01 수정 2018-05-23 1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