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속 서울에만 500여명… 대구선 ‘다이 인’ 퍼포먼스도
경찰청장, 강남역 일대 돌며 치안인프라 구축 상황 점검
여성 피해 대책 쏟아졌지만 미투 처벌도 기대 못 미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된 모든 분을 위해 묵념부터 하겠습니다.”
오보람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국장의 묵념 제안과 함께 서울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2주기 추모집회가 17일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 6번 출구 앞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범죄의 대상이 되고 죽임당하는 현실이 2년 동안 전혀 바뀌지 않았다며 근본 대책을 촉구했다.
‘미투(MeToo)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개최한 추모집회에는 폭우가 내린 궂은 날씨에도 500명 이상의 시민이 검은 옷 위에 우의를 걸치고 참석했다. 취업준비생 이모(25)씨는 “내 또래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이라 남의 일 같지 않아 나왔다”고 말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2016년 5월 17일 오전 1시쯤 강남역 근처 노래방에서 34세 남성이 처음 본 23세 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사건이다. 가해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여성혐오와 차별의 심각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남성 참가자도 곳곳에 있었다. 이들은 다른 참가자와 마찬가지로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만들자’는 글귀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여성도 국민이다”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라” “미투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학생 김기성(23)씨는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제 변해야 할 때”라고 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발언대에 올라 직장 및 학교에서의 성범죄 피해 등을 고발했다. 경찰과 학교, 직장 등의 미온적 대응도 규탄했다.
참석자들은 이어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1만인 선언문’을 발표하고 “성별이 권력과 위계가 돼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를 근본부터 개혁해야 한다. 성평등은 시대의 요구다. 성평등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미투 운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주최 측은 집회 후 사건 장소인 노래방 건물 앞을 거쳐 강남역 번화가 골목을 왕복 행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날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집회 참가자들에게) 염산 테러를 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글이 게재된 탓에 행진은 대로변에서만 열렸다.
부산 광주 대구 창원 전주 등에서도 추모집회가 열렸다. 광주의 참가자들은 연대를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한 후 “저는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입니다” “더 이상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구에선 여성 차별과 혐오에 반대해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다이 인(die in)’ 퍼포먼스를 했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이날 강남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비상벨과 CCTV, 안심화장실, 안심전화부스 등 여성안전 치안 인프라 구축 상황을 점검했다. 경찰은 이날부터 불법촬영·가정폭력·데이트폭력 등 ‘대(對)여성 악성범죄 집중단속 100일 계획’을 실행한다고 밝혔다. 악성범죄자의 구속 수사를 확대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격리 등 긴급 임시조치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여성가족부는 데이트폭력 대책을 발표했다. 지난 1∼4월 여성긴급전화 1366에 접수된 데이트폭력 상담 건수는 390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7% 늘었다.
이 같은 대책 발표에도 “2년 동안 뭘 했느냐”는 비난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 대상 강력범죄는 3만270건으로 2016년보다 10.3% 늘었다.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를 시작으로 미투운동이 확산됐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처벌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서 검사 사건을 조사한 검찰 조사단은 지난달 26일 안태근 전 검사장 등 전·현직 검찰 관계자 7명을 기소하는 선에서 조사를 끝냈다. 경찰은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69명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도 15명은 내사, 33명은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다.
손재호 이사야 강경루 기자 sayho@kmib.co.kr
“성평등은 시대의 요구… 세상 바꾸기 위해 싸우겠다”
입력 2018-05-18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