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44년만의 재심도 ‘간첩’ 인정… 70대 재일교포 징역 8년

입력 2018-05-17 18:22 수정 2018-05-17 21:50

‘박정희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70대 남성이 44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도 중형을 면치 못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과거사 재심사건에서 유죄 판결이 나온 건 이례적이다.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판사 차문호)는 특수탈출 등의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70대 재일동포 A씨의 재심 사건에서 징역 8년에 자격정지 8년을 선고했다고 17일 밝혔다. 재판부는 “북한에 들어갔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 범행”이라며 “남북의 첨예한 대립 가운데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었으므로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A씨는 1972년 당시 반공법(81년 1월 국가보안법에 통·폐합)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19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2016년 4월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수사에 관여했던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불법체포·감금죄를 범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검찰이 A씨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내용은 이렇다. A씨는 초등학교 2학년이던 50년대 중반 학업을 멈추고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알게 된 조총련계 B씨와 함께 71년 북한에 가서 석 달간 박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간첩교육을 받았다. 흥남비료공장, 함흥모직공장 등을 견학하며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수류탄 투척 및 권총 사격법, 평양방송 청취 및 암호해독법 등을 익혔다. 박 전 대통령을 암살하고 검거될 경우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배후인 것처럼 위장진술하기로 했다. A씨는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밀항하다 잡혔다.

검찰은 이 같은 공소내용을 바탕으로 북한에 넘어간 사실에 대해 특수탈출, 북한의 지령을 실행하기 위해 남한으로 들어온 것에는 특수잠입 혐의를 적용했다.

A씨는 공소사실을 강하게 부인했다. 강제로 납북돼 간첩교육을 받았지만 간첩활동을 할 의사는 없었다며 원심 내내 억울함을 호소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불법 구금하고 폭행을 했다는 주장도 폈지만 법원은 두 혐의 모두 유죄 판결을 내렸다.

40여년 만에 재심을 맡은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하지만 모든 혐의를 무죄로 보진 않았다. 특수탈출은 무죄, 특수잠입 혐의는 유죄로 판단했다. A씨를 북한으로 데려간 B씨가 법정에서 “북한의 실상을 보여주고 싶어 온천여행을 가자고 속였다. A씨가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공작원들이 위협하자 포기하고 갔다”고 증언한 것을 받아들였다. 수사관들의 강압수사로 나온 진술의 증거능력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A씨가 국내에 들어올 때는 북한의 지령을 실행할 의사가 있었다고 봤다. 암호해독문을 지닌 채 입국한 점, 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지인을 통해 경찰서에서 암호해독문을 빼돌린 점, 지인이 신고한 뒤에야 자수한 점 등이 근거다.

국가보안법 재심 사건에서 유죄가 인정된 경우는 드물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에 따르면 2007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처리된 124건의 국가보안법 재심 중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자유형 2건, 집행유예 1건으로 3건(2.4%)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무죄 77건(62%), 재심청구 취하 13건(10.5%), 기각 12건(9.6%), 기타 19건(15.3%)이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