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만나 수도권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사람과 차량이 몰리는 곳. 경기도 각지에서 오는 광역, 시외버스들의 최종 목적지이자, 전국 각지에서 오는 차량도 많아 비단 출퇴근 시간이 아니더라도 끔찍한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곳. 매일같이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오가고 마천루가 숲을 이루는 곳. 그리고 빌딩숲 사이를 비틀거리는 불안한 그림자의 행렬이 넘실대는 곳, 이곳은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다.
스트레스를 부르는 경쟁
강남역. 이곳에 어둠이 깔리고 네온사인이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골목마다 즐비한 술집에선 막말 대장 김 부장과, 도통 설거지를 하지 않는 남편, 공무원 시험 경쟁률을 고민하는 이들의 사연이 술잔마다 차고 넘친다. 취기는 퍼져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나 걱정거리를 안고 산다. 걱정, 고민, 스트레스, 우울은 의지가 약한 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훌훌 떨쳐버리란 말을 한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알코올이 주는 일시적 망각과 치유는 별개의 것임을 화자와 청자 모두 앎에도 말이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어슴푸레 어둠이 깔린 시각 동청씨는 병원 문을 잠그고 건물을 나섰다. 한손에 외투를 쥐고 다른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뱃불을 붙여 후 하고 뱉자 연기는 도로변의 매연과 섞여 사라졌다. 그는 정신과 의사다.
“강남역이란 곳이 변화가 크고 다이내믹하죠. 미래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고 경쟁도 과도합니다. 갈등과 스트레스도 상당하죠. 문제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곳은 거의 없다는 거예요. 지인에게 고민을 토로하고 위안받기 어려운 시대가 된 건 아닌가 싶어요.”
정동청(41)씨는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 입학 후 상경한 정씨에게 강남역은 형형색색의 빛으로 가득 찬 ‘정신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데이트도 하고,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비교적 애틋한 기억이 있는 강남역에 그가 터를 잡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지난해 3월 서울청정신의학과를 열고 환자들을 만나면서 그는 화려한 강남의 이면이란, 실상은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군상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현 2030세대를 괴롭히는 건 불확실성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뒤바뀌고 그 흔한 취미하나 없이 일에 치여 사노라면, 슬금슬금 찾아오는 ‘녀석들’이 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따위가 그것이다. 강남역에 올해만 네 곳의 정신과 의원이 문을 연 것도 ‘마음의 감기’에 시달리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일 터. 동청씨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걱정과 고민을 한가득 안고 있다.
직장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 일과 양육으로 지친 워킹맘, 이별, 결혼 생활의 어려움 등 자칫 ‘사소한 이유’로 치부될 수 있어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기 어려운 사연들. 속으로 삭히거나 참다가 병을 키우는 젊은이들이 많다. 이삼십 대는 동청씨를 찾아오는 환자의 70%를 상회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과도한 경쟁을 요구받는 그들에게 ‘요즘 젊은 것들은 끈기가 없다’고 혀를 끌끌 차는 어른이 많을수록 갈등과 반목은 커지고 덩달아 병도 악화된다.
강남역에는 금융, IT 등 다양한 회사들이 존재한다. 회사의 수만큼 거기에 속한 회사원들의 고충도 각양각색이다. 일이 스트레스가 되다 못해 자살의 동기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사실 새롭지 않다. 최근 스타트업 대표의 거친 갑질이 물의를 일으킨 사례만 봐도 회사의 규모가 크건 작건, 직원 수가 많건 적건, ‘회사’란 괴물은 그 구성원들을 고통스럽게 짓누를 때가 적지 않다.
계속 참기만하면 공황장애
동청씨가 귀띔했다. “남자들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만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방법은 딱히 없죠.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가지라고 상담하지만, 바쁜 직장인들이 이런 여유를 내는 것이 사치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죠.”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한다고 스스로 억누르다 발병한 공황장애에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공황장애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가하면 일과 육아를 감당하는 워킹맘들의 직장과 가정 모두를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호소한다. 절대 다수의 배우자들은 아직도 여성이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때문에 온종일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다 귀가한 후에는 집안일에 시달린다. 이들이 숨쉴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없다. 이 역시 우울증을 유발한다.
공시생(공무원 시험 수험생) 등 취업준비생의 고충도 크다. 극심한 취업난에 하늘 높이 치솟은 경쟁률은 노력보단 운에 맡기는 게 차라리 속편할 때가 많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다. 수년간 기약 없는 시험 준비를 하다 이들은 서서히 지쳐 하얗게 고사돼 간다. 주변의 시선, 특히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에 청년들은 눈치를 주지 않아도 스스로 눈치를 받는다.
‘그깟 공무원 시험이 뭐라고 합격을 못하느냐. 악착같이 책상 앞에 붙어 있으면 철썩 합격하는 것 아니냐.’ 이러한 질책에 청년들도 할말은 많다. 기성세대는 지금과 같은 저성장의 늪을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고성장을 기록했던 과거의 기억,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자릴 잡는다는 믿음을 신봉한다. 그러나 현 젊은 세대에게 다시 그러한 시절이 도래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한 가족 안에도 이러한 시각차로 인해 소통이 원활치 않다. 불화는 세대간의 갈등으로, 다시 우울증으로 악화돼 간다.
세대간 시각차 우울증 악화
이렇듯 강남에 척을 둔 회사원, 취업준비생, 워킹맘 등은 한결같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비틀댄다. 판단과 결정의 기준에는 ‘나’보다 ‘부모’, ‘가족’, ‘친지’가 자리 잡는 탓에 열심히 살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다. 이렇게 쫓기듯 살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아도, 이마져도 질환으로 인지하지 못해 병이 악화된 후에야 동청씨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사회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강요하는 것 같아요. 좋은 자녀, 좋은 남편, 좋은 부인 등 항상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회사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이를 받아들이고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설사 이러한 부당한 지시가 괴롭히기 위한 것이라 해도 이를 유발시킨 건 ‘나’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해요.”
정신과 전문의들이 환자에게 우스갯소리로 건네는 말이 있다. 남 탓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다. 바꿔 말하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모든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부당한 일을 당해도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으니 이런 일을 당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건 주입된 강요일 수도 있다. ‘네가 잘하면 그러겠니’라거나 ‘평소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따위의 조언을 가장한 폭력을 유년부터 강요당해 온 탓이다.
강남역에는 오늘도 숱한 이들이 바삐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할 것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을 가기 위해, 첫 출근을 하거나, 해고를 당해 터덜터덜 역 주변을 서성이는 이들까지 강남역 10번 출구는 각자의 사연을 지닌 이들로 가득할 것이다.
김양균 쿠키뉴스 기자 angel@kukinews.com
[김양균의 현장보고] ‘삶의 무게’에 짓눌린 그들… 우울은 더 커져간다
입력 2018-05-20 1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