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g 용량에 불과한 작은 병에 쌀을 담아 판매하는 일명 ‘보틀 라이스(bottle rice)’가 지난해 시중에 선보인 이후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부피도 크고 묵직한 종이 포장지 쌀 포대만 보아온 소비자의 눈에는 분명 신선한 디자인이다. 들기 편하고 냉장고에 보관하기 쉽다는 점이 사랑받는 이유다. 소포장, 소용량이라 구입에 부담이 적고 입맛에 따라 여러 잡곡을 섞어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투명한 용기에 담긴 쌀과 잡곡 본연의 은근하고 정감 있는 색감에 우리 곡물을 이전보다 더 귀하게 보게 됐다는 지인도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는 속담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진리다. 농식품 분야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남보다 앞서 ‘농식품 포장의 시각화’라는 차별화 전략을 내세워 소비자들과 교감에 성공한 모범 사례가 적지 않다.
올 들어 현장방문길에 눈에 띄는 몇 곳을 만났다. 전북 전주에서 올곧게 활동하는 ‘디자인 농부’와 지리산 자락 아래 전남 구례 산수유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은 ‘구례 삼촌’이 유독 눈길을 끈다. 디자인 농부의 젊은 대표는 처음 농업법인을 설립하고 제품 개발에 몰두하면서부터 서울의 유명 식품 매장을 돌며 국내외 가공제품의 포장과 용기, 중량을 비교하는 시장 조사에 전념했다. 막대형인 일회용 커피에서 착안해 생산한 팥과 검은 콩가루, 곡물분말을 혼합해 만든 미숫가루가 그래서 탄생했다.
한 끼 식사대용으로 흠잡을 데 없는 건강식일 뿐만 아니라 커피 마시듯 편하게 타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16년에는 농식품 굿 포장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우수상을 받는 영광도 안았다. 농촌진흥청은 망이 촘촘한 실크 삼각티백 국유특허 기술을 이전해 면 티백보다 깨끗하게 차를 우려낼 수 없을까 하는 젊은 농업인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구례 삼촌 쑥부쟁이는 다소 생소한 농산물을 가공해 과자와 머핀을 만들고 체험장을 겸한 쑥부쟁이 카페를 열어 지역의 새로운 명물로 거듭나게 한 주인공이다. 쑥부쟁이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국화과 야생초다. 접시에 담긴 머핀의 장식이 예사롭지 않아 물어보니 다양한 쑥부쟁이 요리법을 개발하는 요리 전문가가 모든 제품의 디자인 부분을 세심하게 관리한다고 했다. 생명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연초록 쑥부쟁이 제품의 디자인이 남달라 보인 이유였다. 농촌진흥청이 지난해 ‘굳지 않는 떡’ 기술을 이전했고 이를 활용해 올가을부터 쑥부쟁이 송편, 인절미 등 떡 만들기 체험도 진행할 예정이다.
올해의 소비 트렌드로 ‘가심비(價心比)’가 주목받고 있다. 가격이나 성능보다 심리적 안정이나 만족감을 중시하는 소비 형태를 말한다. 만족도가 실제 소비에 있어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된다는 의미다. 가심비 충족의 최적 요건을 우리 농업 농촌에서 찾을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농산물을 원재료로 투박하지만 진솔한 마음을 담아 빚어낸 농식품. 여기에 이색적 디자인과 아이디어만 제대로 입히면 상품 만족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품질 좋은 농산물을 통해 심리적 만족을 주는 것도 농업이 지닌 가치 중 하나다. 농업에 인생을 걸고 조금 더딜지언정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한 길을 걷고자 하는 농업인들의 소신을 응원한다.
라승용 농촌진흥청장
[기고-라승용] 농업에 디자인을 입히다
입력 2018-05-12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