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5> 김남훈 장로

입력 2018-05-12 00:00
파독 광부 출신 김남훈 장로(왼쪽 네 번째)가 2013년 독일 함부르크 순복음교회에서 찬송을 부르고 있다. 김남훈 장로 제공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 독일 방문 당시 기념사진. 김남훈 장로 제공
1975년 동료 광부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일하러 가는 모습. 김남훈 장로 제공
김남훈 장로가 2011년 독일 함부르크 순복음교회에서 야외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박경란 칼럼니스트
삶의 시간은 각자의 사용방식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에겐 쉽게 흘려버릴 한 시간이 어떤 사람에겐 10가지 일을 하게 한다. 시간은 성실히 관리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그래서 순간의 기적을 놓치지 않고 충실하다 보면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린다. 김남훈(68) 장로의 생각이 그렇다. ‘그저 잘될 거야’라는 막연한 긍정론보다 현실에서 차곡차곡 소망을 쌓아간다.

그는 독일생활 44년 중 실업수당을 받은 적이 없다. 일을 놓은 적이 없다는 얘기다. 25만 마르크를 투자한 식당이 망한 다음 날 일거리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그의 근성은 월남전에서 기인했다.

“15개월간 백마부대에서 복무했는데, 당시 전두환씨가 연대장이었죠. 철수병력인데 코앞에서 대대장이 전사한 거예요.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지요. 그때 ‘살려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나님을 전하겠다’고 기도했어요.”

김 장로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맛손’으로 통한다. 요식사업만 25년째다. 맛 내는 기술이 있으니 나이 칠십이 다 돼도 오라는 데가 많다.

그는 원래 파독 광부였다. 그때 우리나라는 생존이 윤리였던 시대였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라도 일자리 찾기가 힘들었다. “파독 광부 모집장소에 갔더니 담당자가 저보고 모래 가마니를 들어보라 해서 번쩍 들었더니 합격이라고 하더군요.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 같아요.”

고교시절 어머니의 죽음 후 하나님을 믿게 됐다. 1974년 독일 딘스라켄 광산에서 일할 때 광산교회에 출석했다. 나중에 함께 신앙생활을 한 광부 중 대여섯 명이 목사로 부름 받았다. 3년 계약이 끝났지만 독일에 남고 싶었다. 호텔관광 관련 직업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공부를 중단하고, 쿡스하펜의 작은 식당에서 서빙 일을 시작했다. 미래가 암담했다. 힘들 때 피우게 된 담배가 어느새 위로가 된 것도 그때다. 골초가 된 그는 ‘집사 직분을 감당하려면 담배를 끊고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목사의 조언을 받았다. 수시로 끊으려 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식당 종업원 일을 그만두고 잠시 정원사로 일할 무렵에야 담배가 싫어졌다.

80년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독일회사에 지분을 넘겼다. 다른 사업을 계획할 동안 함부르크 영사관의 운전사로 일했다. 그에게 쉼은 없었다.

돈을 모아 작은 식품점을 열었다. 사업은 여전히 내리막길이었다. 4년간 운영하다 문을 닫고, 88년에는 다른 지역에서 7년 반 정도 식당을 경영했다. 늘 성공은 미약했고, 실패는 크게 다가왔다. 문득 월남전의 포화 속에서 주님께 드렸던 기도가 스쳐갔다. 하나님은 월남전의 고백을 기억하셨고, 말씀을 들려주셨다. ‘지금은 비록 메마른 땅 같을지라도 물댄 동산 같게 하시고 마르지 않는 샘 같게 인도하시겠다’는 위로와 축복이었다.

2010년 하나님은 그를 함부르크 한인회장으로 세우셨다. 지역 전도자의 길을 걷게 하셨다. 그는 무궁화축제를 통해 독일인에게 한국요리 시연을 하는 등 한국문화를 소개했다.

행사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을 주빈으로 모셨다. 임기 동안 한인회 모임에서 목사의 식사기도를 정착시킨 것도 그다. 세월호 참사 때는 함부르크 7개 교회 목사를 초대해 추모예배를 드렸다.

98년부터 ‘임비스 킴’이라는 식당을 운영했다. 중국요리를 기본으로 하고 나중에는 일식까지 겸했다. 그는 볶음요리 전문가였다. 하지만 사업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세금비율이 높은 독일에서 자영업자에게 재정 압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업의 어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주님께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문제를 보게 하셨다.

“파독 광부 출신인 이상준씨가 북부독일 식당의 대부였지요. 저는 그 사람의 제자라고 볼 수 있는데, 식당일을 하면서도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우질 못한 게 후회가 되더군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니 기회가 찾아왔다. 식당경영을 내려놓고 지난해부터 아예 요리회사에 취직했다. 함부르크에만 28개의 체인점이 있는 스시업체였다. 그곳에서 스시 마이스터에게 정식으로 스시를 배웠다. 황혼의 나이에 인생 이모작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무거웠지만 가슴은 뿌듯했다. 김 장로는 그것을 ‘일하는 즐거움, 잠 잘 오는 피곤함,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표현했다. 집안에서도 믿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했다. 건축설계사 큰딸과 독일 풍력에너지 연구위원인 아들, IT 전문가인 막내가 그 열매다. 힘든 여건 속에서 잘 성장한 자녀들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아버지의 신앙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는 4월부터 한인식당의 요리사로 또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열심히 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꿈’이었다. 선교와 전도였다. 김 장로가 출석하는 교회(함부르크 순복음교회)는 필리핀에 3만 유로를 지원해 교회를 건축했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는 선교지를 돌며 돕는 자의 일을 감당하길 원한다. 그가 지치지 않고 일하는 단 한 가지 이유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