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못 참겠다… 조양호 일가 물러나라”

입력 2018-05-05 05:00
가면을 쓴 대한항공 직원들과 시민들이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모여 조양호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직원들은 신분 노출을 막고 저항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영화 ‘브이포벤데타’에 등장하는 ‘가이 포크스’ 캐릭터의 가면을 착용했다. 윤성호 기자

저항 상징하는 가면 착용 박창진씨가 사회 맡아 시민들 “힘내라” 연신 외쳐
단톡방 통해 공론화 시동 이명희씨 폭언·폭행 공개 회장 자택 비밀의 방 제보도
警, 조현민 구속영장 신청에 檢“불구속 수사하라” 지휘

가면 속 긴장한 목소리가 촛불집회 시작을 알렸다. 목소리 주인공은 4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집회 사회를 맡은 땅콩회항 사건 피해자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이었다. 저항을 상징하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집회 참가자들도 박 전 사무장 목소리처럼 다소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들은 직원과 하청업체에 갑질을 일삼아온 조양호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기 위해 모인 대한항공 직원들이었다.

다소 위축됐던 집회 분위기는 시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바뀌었다. “힘내라 대한항공!” 집회 소식을 듣고 오거나 퇴근길에 집회를 목격한 시민들은 힘있게 외쳤다. 집회 현장을 찾은 시민 김모(68)씨는 “뉴스를 보면서 대한항공 이름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에 직원들을 응원하러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주최 측은 당초 집회 참가 인원을 100명으로 예상했으나 500여명이 세종문화회관 계단을 빼곡이 채웠다. 승무원 조종사 정비사 복장을 입고 온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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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가득 메운 집회 참가자들이 들고 있는 팻말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뜻은 하나였다. 조직의 규율이 강한 대기업에서 직원들이 오너 일가 퇴진을 요구하며 단체행동에 나선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법으로 보장된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이 아니라 개개인이 힘을 모아 이런 집회를 개최한 일은 처음이다. 대한항공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실추됐던 2014년 ‘땅콩회항 사건’ 때도 이런 움직임은 없었다. 그동안 대기업과 관련된 갑질 사례가 알려져도 직원들은 ‘대나무숲’ ‘블라인드’ 등 익명이 보장된 온라인 공간에 불만을 토로하는 게 고작이었다.

대한항공 직원들도 처음엔 익명 단체채팅방(단톡방)으로 모였다. 자신들이 조 회장 가족에게 당해온 갑질과 업무 중에 목격한 편법·불법적인 행태를 하나씩 쏟아내다 이날 처음으로 촛불집회를 열었다. 단톡방 운영자는 박 전 사무장을 통해 “나는 단톡방에 숨어있지만 끝까지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라며 “우리는 모두 대한항공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 순간 단톡방에는 ‘자랑스런 관리자님 눈물나네요’ 등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촛불집회는 2016년부터 시작돼 지난해까지 이어졌던 국정농단 촛불집회와 닮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촛불집회로 세상이 바뀌면서 약자들도 목소리를 모아 잘못된 것을 고발하면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경험을 했다”며 “노조를 통했던 문제 제기 방식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스스로 목소리를 내 여론의 힘을 얻어서 내부 문제를 고쳐보자고 나선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단톡방을 통해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폭언과 폭행을 세상에 공개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조 회장의 집에 숨겨져 있던 비밀의 방도 제보했다. 조 회장 일가가 대한항공 항공기로 해외 명품을 밀수입했다는 폭로도 나온 상태다. 경찰은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컵을 던진 혐의(폭행 및 업무방해)를 받는 조현민(35) 전 대한항공 전무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업무방해 혐의에 다툼의 소지가 있다”며 불구속 수사하라고 지휘했다. 경찰은 “충실히 보강수사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밀수 의혹은 관세청이 조사 중이다.

대한항공 촛불집회의 파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직 가늠하기 이르다. 이 교수는 “대한항공 직원들의 결속이 이어지고 여론도 여기에 화답할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사무장은 “일주일 내에 2차집회를 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택현 강경루 임성수 기자 alley@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