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어린 것들 또 떠나보내니 지켜주시길” 애끓는 기도

입력 2018-05-05 00:01
고암 김득황 장로 (1915∼2011)
동방평택복지타운 직원이 교사 손을 잡고 잔디밭으로 산책 나온 어린이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이곳은 국내외 그리스도인의 헌금 등으로 1980년대 조성됐다.
내무부 차관 재직 당시의 김득황 장로. 박정희정권이 한일협정 반대 등에 나선 한경직 강원용 목사 등을 탄압하자 공직 사퇴의 진을 치고 막아냈다(위 사진). 김득황 장로가 6·25전쟁 당시 부산 송도 공동묘지 인근 집에서 고명딸 김진숙씨를 안고 두 아들과 찍은 사진. 당시 보건사회부 총무과장이었다.
입양 보내는 아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김득황 장로(가운데). 이들은 훗날 의사, 소믈리에가 되어 돌아왔다(위 사진). 해외개발공사 사장 재임 당시 서독과 광부 송출 협상을 벌였던 김득황 장로(오른쪽 네 번째). 청렴한 공직자로 칭송받았다(가운데 사진). 동방평택복지타운 내 동방학교 아이들이 교사들과 함께 드론을 조종하고 있다. 이 학교엔 200여명이 공부하고 있다(아래 사진).
김득황 장로 저서들
아이는 아침밥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거실 바닥을 뒹굴며 선생님을 힘들게 했다. “태호(가명)야. 밥 먹으러 가자. 형들 다 갔네. 자 일어나.”

그런데도 여덟 살 태호는 유치원생처럼 떼를 쓴다. 그 떼쓰는 이유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지적장애를 가진 태호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태호, 그리고 태호와 함께 가려는 형 준영(가명)의 설득은 오래오래 계속됐다. 결국 ‘선생님 엄마’는 식당에서 밥을 가져다 먹이기로 했다. 지난 1일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동방평택복지타운 내 ‘아동재활원’의 일상이다.

이 복지타운은 동광교회를 중심으로 돌봄이 필요한 이들이 생활하는 마을이다. 장애아동이 주거하는 ‘동방재활원’, 만 3세 미만 요보호 아동을 위한 ‘야곱의 집’, 지적장애와 지체장애 어린이·청소년 교육을 위한 ‘동방학교’, 장애인이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게끔 근로 기회를 제공하는 ‘동방재활근로복지관’, 미혼모에게 안식과 의료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에스더의 집’과 ‘아동상담소’ 등이 있다. 또 평택지역아동보호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복지타운은 1980년대 전후의 건축물로 이뤄졌다. 비록 노후화됐어도 정성스럽게 관리돼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안전한 곳이다. 그 시작은 한 교회 장로로부터 비롯됐다.

광복군 출신 기독교지도자

고암 김득황(동방사회복지회 설립자) 장로. 그는 항일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전후 보건사회부 원호국장과 내무부 차관 등을 지낸 공직자. 기독교반공연맹 이사장과 한국십자군연맹 회장을 역임한 복음주의 기독교지도자였다.

고암이 전후 가난한 조국을 등지고 해외 입양을 가야만 했던 어린이들을 어떻게든 모국에서 키우고자 설립한 곳이 동방평택복지타운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이들을 책임지겠다는 그의 비전이 담긴 곳이다. 그는 미국과 유럽 교계에 호소해 아동을 위한 구호물자를 들여왔고, 한 외국인 독지가의 큰 도움을 받아 1970년대 말부터 벽돌 한 장씩을 올리기 시작했다.

복지타운 정문에 들어서면 고암이 어린이를 격려하는 기념비가 반긴다. 논밭 한가운데 야산을 매입해 세운 시설이다. 그때 심었던 나무들은 이제 숲을 이뤘다. 아이들은 재활원을 나와 동방학교로 등교하고, 지역사회 장애아동들도 스쿨버스를 타고 도착한다. 그러면 평온하고 감사한 하루가 시작된다. 동광교회에선 주일과 삼일 예배가 올려지고 교사와 직원들은 말씀 안에서 헌신한다.

고암은 평북 의주 출신의 무관 집안 자제였다. 평안도는 일찍이 기독교가 들어와 백천 김씨 일가도 예수를 믿게 됐다. 그는 어려서 의주군 비현면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머리가 명석해 20대 중반 일본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당시 청년 엘리트들이 사회주의에 빠져 있던 것과 달리 기독교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만주국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지금의 중국 지린성 퉁화에서 만주국 관리로 일했다. 때문에 한때 친일파였다는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고암의 항일운동 사료와 증언 등이 쏟아지면서 오해를 벗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안다.

고암은 해방 전 ‘광복군 국내 제2지대’ 소속으로 활동했다. 조동진(93) 목사의 증언이다.

“나는 한일협정반대 기독교구국대책위원회의 영락교회 집회에 나가 반일 강연을 했다. …언론은 내 강연 중 반(反)군사정권 발언 부분만을 확대 보도했다. 중앙정보부는 기독교의 한일협정 반대운동에는 북한 간첩이 스며들어 있다며 한경직 강신명 강원용 전경연 목사 등을 옥죄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무차관인 김득황 장로가 찾아와 ‘위험하니 더 이상 가담하지 말고 물러나라’고 말했다. 김 장로는 광복군이었던 아버지(조상항)의 부하로 고향 사람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나를 설득하는 게 어려워지자 구속 방침을 정했다. 이때 김 차관(장로)은 독립운동가답게 배수의 진을 치고 ‘조 목사를 체포하려거든 내 사표부터 받고 하십시오’ 하고 맞섰다.”(국민일보 2001년 9월 3일자 ‘나의 길 나의 신앙’ 중)

조 목사는 평북 용천 출신으로 문익환 강원용 한경직 목사 등과 한국 근현대사에 기독교 정의의 가치를 심었던 인물이다. 선교학 1세대이자 서울 후암장로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그의 아버지 조상항 선생은 중국 칭다오와 상하이 등지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돼 7년간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고암은 만주국 관리 시절 독립운동가이자 집안 어른인 김승학(1881∼1965)의 지시를 받아 일본군의 동향을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비밀임무를 맡았다. 또 한인 항일 비밀결사체 태극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해방되자 그가 속한 ‘제2지대’의 부관처장을 맡아 전면에 나섰으나 미군정이 이듬해 1월 포고령 28호를 발동해 광복군 등 국내 무장단체를 강제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김승학과 동지들을 피신시키다 미군에 체포되기도 했다. 변호를 맡은 이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김구 선생의 며느리인 안미정이다. 그는 안미정의 변론에 힘입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고암은 신생 대한민국 공무원이 됐다.

자유주의 남한에서 그는 서울 궁정동교회를 섬겼다. 6·25전쟁이 발발했고, 어린이들이 버려졌다. 서울 신계동 목조주택에 살던 그는 자신의 5남 1녀도 벅찬데 세 아이를 수양딸로 삼았다.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때 부모를 잃은 아이,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였다.

“우리 부모님이 밥을 준다는 얘기가 거지들 사이에 퍼지면서 문 밖은 늘 소란했어요. 오빠들이 불만을 토로하면 ‘그대로 두면 굶어 죽을 게 뻔하지 않으냐’고 나무라셨지요.”(김진숙 동방사회복지회 회장)

행정 관료의 길을 가던 그는 1956년 보건사회부 원호국장을 맡아 원조물자를 관리했다. 어수선한 사회라 마음만 먹으면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청지기이고자 했다.

논 한가운데 세운 ‘어린이 천국’

“1957년 나는 기계제도과 교사이자 교무계장으로 김득황 국립재활원장을 모시게 됐다. 당시 재활원은 전쟁으로 전상 입은 사람이 많이 후송됐던 부산 동래에 있었다. 김 원장은 검소와 청렴이 몸에 밴 분이었다. 공사 분별도 분명하셨다. 상이군인을 가르치는 원장이 혼자 편하게 하숙생활 할 수 없다며 원생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종종 공무로 댁이 있는 서울 출장을 가셔도 여비 중 실비를 꼭 반납하셨다. 서울 집이 있어 숙박비가 안 드니까 남았다는 것이다. 원장직을 그만둘 때 전별금이 들어왔는데 고스란히 원생들 내의를 사서 선물로 나눠주셨다.”(김금경 전 중앙노동위원장)

고암은 가난한 조국을 위해 늘 기도했다. 그의 태도는 공무원 사회의 귀감이 됐었고 그런 평판에 힘입어 1964년 내무부 차관이 됐다. 서슬 퍼런 박정희정권 시절이었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공직을 던질 만큼 강직했다. 서독 광부 파송 협상도 그가 해외개발공사 사장 시절 이뤄냈다.

그는 연희동에 살며 40여년을 인근 안산에 올라 매일 산상 새벽기도를 했다. “의주 비현에 아버지가 무릎 꿇던 바위가 있었는데 안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김진숙 원장이 말했다.

공직을 마친 후 고암은 비로소 마음에 무겁게 남았던 아이들을 섬기는 일을 시작했다. “입양이 불가피했던 시절이었고 아버지는 그것이 늘 자신의 탓인 양 마음 아파하셨어요. 보내는 아이들을 위해 정말 간절히 기도했어요. ‘어린 것들을 상처 입혀 또 이렇게 떠나보내니 꼭 이 생명을 지켜주시옵소서’ 하고 말이죠.”

그렇게 미국으로 보낸 아이들이 어느 날 소아과 의사, 소믈리에, 교사가 돼 돌아왔다. 각기 서울역에 버려진 생후 6개월 여자아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18개월 된 남자아이, 생후 9개월의 청각장애인이었다.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으로 돌아온 이도 있었다.

고암은 60년대 말 동방사회복지회를 설립한 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 흔한 자가용이 없었다. 어느 날 직원이 고암의 차량을 구입하려 하자 “그 돈을 왜 쓸데없이 나를 위해 쓰느냐. 아이들 위해 써야 할 돈 아니냐”고 호통을 쳤다.

다시 동방평택복지타운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역주민의 반대 끝에 논 한가운데 어렵게 들어섰던 복지타운은 요즘 타운 주변의 급격한 도시화로 초고층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아이들 통학버스가 다니기 힘들 정도다. 입주가 본격화되기도 전인데 민원이 적잖다. 다들 걱정했다. 유일한 힘은 기도밖에 없었다.

아동재활원 옥상에 가봤다. 빨랫줄에는 아이들 옷이 아파트 공사 크레인을 배경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어린이 장애인 시설이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김득황 장로 저서들
‘한국사상사’ 친일파 정면 비판


김득황 저(著) ‘한국사상사’(1958년 간) 제7장 ‘종전전의 말기적 사상’은 친일단체 대동민우회 조선문인협회 야마도동맹 등과 이광수 박흥식 윤치호 박희도 등의 친일행적을 비판했다. “이광수는 우리가 천황의 신민이라는 이성 잃은 논문을 발표했다”며 일제 앞잡이임을 분명히 했다. 당시 친일파를 정면으로 비판한 충격적 저서였다.

김득황은 ‘한국사상사’ 외에도 ‘만주의 역사와 간도문제’ ‘만주사화’ ‘백두산과 북방강계’ ‘우리민족 우리역사’ ‘한국종교사’ ‘한국고대 도덕의 연구’ 등을 남겼다. 학계에서는 그를 ‘간도사 연구 1세대’로 부른다. ‘기초 만한사전’ ‘만주족의 언어’ 등은 잃어버린 땅 만주를 찾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기초 텍스트가 되고 있다.

평택=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