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포옹의 힘

입력 2018-05-04 00:01

1996년 타임지는 하나의 인큐베이터 속에 있는 두 신생아의 사진을 게재했다. 출생 예정일보다 석 달이나 빨리 세상에 태어난 쌍둥이 아기들이었다. 합쳐도 체중이 1.8㎏밖에 되지 않는 두 아기는 각각 다른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었다.

언니는 비교적 잘 자랐지만 동생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출생 후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동생의 호흡과 맥박이 흐트러지면서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심장 박동이 갈수록 나빠졌고 얼굴빛도 창백하게 변해갔다. 그때 병원의 한 간호사가 놀라운 제안을 했다. 두 아이를 같이 옆에 두자는 것이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의 양수 속에서 서로 접촉하고 있었던 두 아이를 함께 있도록 하는 것이 안정감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두 아기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두는 것은 병원 방침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관계자들은 망설였다. 하지만 아기들을 살리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써보고자 하는 아기 엄마의 간곡한 요청으로 결국 두 아기는 한 인큐베이터 안에 눕게 되었다.

언니를 동생의 인큐베이터 안에 누이자 그때부터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아기들이었지만 언니가 동생에게 손을 뻗어서 포옹하듯 끌어안았고 그 순간 불규칙했던 동생의 심장 박동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두 아기의 혈압과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죽음이 임박했던 동생의 심장과 혈압, 체온이 건강한 언니와 똑같아진 것이다. 이 ‘생명을 구한 포옹’으로 두 아기 모두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포옹에는 이처럼 신비한 생명의 능력이 있다. 렘브란트는 탕자의 비유를 주제로 4점의 성서화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탕자의 귀향’이다. 그림에는 집을 나간 아들이 정처 없이 방황하다 마침내 아버지께 돌아와 포옹을 나누는 순간이 담겨 있다. 탕자는 아버지 품에 안겨 흐느끼고, 아버지는 우는 아들을 두 팔로 감싸 안고 있다. 그들 위로는 밝은 빛이 비치고 있다. 아버지의 포옹으로 아들은 회복돼 다시금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으리라.

포옹은 서로 안아주는 행위이다. 그것은 내가 타인을 안는 행위이자 내가 타인에게 안기는 행위이다. 포옹의 신비는 내가 상대를 포옹하고 위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나 또한 포옹을 받으며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포옹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역할을 번갈아 하며 공감하게 된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교감하고 안도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셨다. 온 인류를 포옹하기 위해 양팔을 넓게 벌리셨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품 안에, 예수님은 우리의 품 안에 들어오신다. 내가 그에게 들어가고, 그가 내게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한 번의 포옹이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지난달 27일 세계가 주목한 가운데 남북의 두 정상이 파격적으로 포옹하는 장면이 송출됐다. 흡사 멀리 떠나있던 아버지와 아들처럼, 또한 이제는 돌아와 마주한 형과 동생처럼.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미움과 갈등이 있었던가 싶었다. 우리는 다가올 평화에의 바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남과 북이 하나 되어 팔을 벌릴 때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 두 팔을 벌려 상대방을 포옹해야 할 때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안고 있는 내 형제도 팔을 벌려 나를 안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박노훈 (신촌성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