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학계 “유엔 결의문 오독” 정부 수립 등 핵심안 조목조목 비판
교육부 “집필자가 알아서 할 일” MB·朴 정부 때와 달라진 입장
확정된 것 아니라지만 갈등 예고
교육부가 2일 공개한 중·고교생용 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안에는 진보 역사학계의 시각이 대거 반영됐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제출한 시안이지만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 뒤 새로 만드는 검정 역사교과서의 가이드라인이 될 초안이어서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보수 역사학계는 ‘정권 바뀌면 두고 보자’며 벼른다.
평가원 시안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올 부분은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보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고교 한국사 집필기준 평가원안을 보면 ‘남한과 북한에 각각 들어선 정부의 수립 과정과 체제적 특징을 비교한다’고 썼다. 현재 학생이 쓰는 교과서의 집필기준은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은 사실에 유의한다’고 기술했다.
평가원은 1948년 당시 유엔의 합법정부 승인 결의에는 대한민국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표현돼 있고,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므로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고 봤다. 보수 역사학계의 입장은 유엔 남북 동시가입 이후는 몰라도 1948년 당시에는 유엔으로부터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진보 역사학계가 유엔 결의문을 오독했다고 주장한다.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꾼 것도 논란이 예상된다. 평가원은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복지국가원리를 당연히 내포하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지칭한다’란 입장을 내놨다. 보수 역사학계는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며 민주주의란 말을 쓰기 때문에 북한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가 들어가야 한다’고 반박했다. 북한의 대남 도발과 북한 인권을 언급하지 않은 부분, 새마을운동 베트남파병 등을 명시토록 하지 않은 점도 보수 진영은 못마땅해 한다.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점은 보수 측 요구에 따라 집필기준의 상위 기준인 교육과정에 포함됐다.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정권 코드에 맞추기만 급급했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보수 측 역사관을, 진보 정권으로 바뀌면 진보적 시각을 ‘학계 중론’이라며 학생에게 가르치도록 입장을 뒤집었다.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론도 그중 하나다. 노무현정부 때는 “유엔 결의에 따른 총선거를 통해 수립되고 유엔에 의해 합법정부로 승인되었음을 강조한다”고 했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뒤 교육과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연구진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란 구절을 빼 보수 진영의 반발을 불러오자 당시 교육부가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됨)”라고 정리했다. 당시 교육부는 일부 출판사가 교과서에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정통성을 가진’ 등의 단서를 달자 ‘남한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수립되었던 객관적 사실을 오해하도록 했다’며 수정 명령을 내렸다.
1948년 대한민국 국가가 수립됐는지, 정부가 수립됐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박근혜정부 당시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 과정에서 불붙었다. 당시 교육부는 대한민국 (국가) 수립이란 입장에 섰다. 이때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보수 역사학계 시각을 받아들인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서자 이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는 진보 역사학계의 시각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라며 입장을 번복했다.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도발도 이명박·박근혜정부 때는 학생에게 꼭 가르쳐야 할 부분이란 입장이었지만 문재인정부 들어서는 ‘교과서 집필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뒤집었다.
교육부 관계자는 “평가원이 제출한 시안대로 실제 교과서가 집필된다고 단정하긴 이르다”고 말했다. 평가원안은 교육부가 구성한 교육과정심의회에서 심의·자문을 거친다. 심의회는 교원과 교육전문가, 학부모, 비영리 단체 관계자 등으로 구성돼 있다. 교육부는 심의를 통해 최종안을 만들어 행정예고한 뒤 국민 의견을 듣는다. 다시 심의회 의결을 거쳐 새 교육과정 집필기준을 고시한다. 각 출판사는 이를 바탕으로 교과서 심사본(초안)을 만든다. 심사본은 평가원의 검정심사를 받아 통과하면 2020년 3월부터 중·고교 현장에서 교과서로 쓰인다.
이도경 기자
역사교과서 이번엔 ‘진보색채’ 뚜렷… ‘이념전쟁’ 재연 불가피
입력 2018-05-02 19:00 수정 2018-05-02 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