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여의사였던 박에스더(본명 김점동)와 남편 박여선의 헌신적인 삶을 기리는 기념비가 미국에 세워졌다. 이번 기념비 건립으로 한국선교 초기 의료사역에 힘썼던 박에스더와 아내를 정성껏 뒷바라지했던 박여선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국민일보 4월 7일자 18면 참조).
미국 메릴랜드주 엘리콧시티 베다니 한인감리교회(박대성 목사)는 지난 21일(현지시간) 볼티모어 로레인파크 공동묘지에서 박에스더·박여선 부부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을 열었다. 기념비는 볼티모어 로레인파크 공동묘지에 있는 박여선의 무덤에 세워졌다. 박여선은 선교사들이 영어로 발음하면서 본명과는 달리 박유산이란 이름으로 후대에 알려졌다.
박에스더는 조선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복음전파, 의료사역에 힘쓴 인물이다. 그는 학창 시절 감리교 초대 선교사인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하며 서구 문물을 접했다. 이화학당 시절 영어 실력이 뛰어나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1895년 1월 셔우드 선교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고 1896년 최연소로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삶 뒤에는 남편 박여선의 희생이 자리 잡고 있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박여선 역시 공부에 뜻이 있었으나 그는 아내를 위해 뒤에서 돕기로 결심했다. 그는 농장이나 식당에서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박여선은 안타깝게 1900년 4월 폐결핵에 걸려 32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아내의 졸업을 3주 앞둔 때였다.
박에스더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그해 11월 조선으로 돌아와 여성전용병원 보구여관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매년 평균 5000여명의 환자를 휴일 없이 돌보고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왕진을 다녔다. 그는 영어교재를 한글로 번역하고 성경 교육도 하다가 남편과 마찬가지로 폐결핵에 걸려 1910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박에스더를 평생 지켜 본 로제타 홀은 일기에 “박에스더는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고 썼다. 그의 아들 셔우드 홀은 박에스더의 죽음을 계기로 결핵 퇴치를 위해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됐다. 이후 1928년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소를 세웠고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을 한국 최초로 도입했다.
기념비는 여러 사람의 헌신을 통해 세워졌다. 지난해 7월 박여선의 묘를 찾은 익명의 감리교인들이 설립에 도움을 줬고 토지 소유자 키츠 스미스는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기념비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 박대성 목사는 “10년 전부터 기념비 설립을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며 “이제야 두 분을 향한 마음의 빚을 조금 갚은 것 같다”고 전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한국인 최초 여의사 부부의 숭고한 삶 기려
입력 2018-04-3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