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무엇인가. 좋았던 기억은 기억하면 할수록 과거가 의미 있게,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기억은 때론 상처가 되기도,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 중 일부는 억압된 기억에서 비롯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감정이 현재 겪는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머릿속 깊숙이 파묻혀 있던 기억이 치유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단 기억은 하되 다른 각도에서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는 사건들을 바꿀 순 없지만 삶의 재해석을 통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기억해 내는 게 중요하다. 현재는 비록 어려움 속에 있지만 예전에 나에게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 내 삶의 고통 속에서 나를 건져주셨던 하나님을 기억의 창고에서 불러와 새롭게 경험한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적 갈등과 고난을 극복하는 커다란 힘이 된다.
기억과 트라우마
기억(記憶)이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다시 생각해내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기억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기억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자카르(zakar)’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사실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묵상하며 스스로를 권면해 일깨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행위를 의미한다. ‘주를 기억하라’는 말은 단순히 마음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란 뜻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라는 것이다.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현재의 ‘나’를 지배한다. 기억은 곧 그 사람 자체라고 할 만큼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마음속에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 나의 생각과 말,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승리의 기억은 그 사람을 낙관적이고 용감하게 만든다. 반면 패배의 기억은 비관주의와 패배감을 심어준다.
이는 비단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집단의 기억은 집단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토대가 된다. 예를 들면 과거 영광에 대한 집단적 기억은 그 집단의 현재와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경기장에 ‘AGAIN 1966’이란 현수막이 내걸렸다. 한국은 1966년 이탈리아가 북한에 일격을 당한 기억을 되살려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봉인된 기억의 상자를 연 것이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에 승리한 기억이 한국 선수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은 반면 이탈리아 선수들에겐 왠지 모를 불길함과 불안감을 안겨줌으로써 그들을 위축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많은 사람이 기억할 때 그것은 역사가 될 것이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집단심리를 형성하는 기본 원인은 집단의 기억, 즉 그 집단의 역사에 있기 때문에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는 구성원은 생활감정과 재능 품성 의지력 등에서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공통 경험을 기억하는 집단이 많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다.
“이집트 학자 얀 아스만의 이론에 의하면 ‘문화적인 기억’은 한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이 문화적인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은 공동체의 와해와 해산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문화적인 결속을 강조한다. 따라서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을 기념하는 ‘안식일’이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되었다.”(배철현의 ‘신의 위대한 질문: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교회는 치유공동체
치유되지 않은 공동의 기억은 집단 트라우마로 남는다. 동일한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에겐 감정 재능 품성 의지력 등에서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고 한다. 이런 집단의 기억은 집단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토대가 되므로 집단 트라우마는 반드시 치유가 필요하다. 만일 치유과정을 거치지 못한 아픈 기억은 폐쇄된 삶에 고스란히 남는다. 말할 수 없이 큰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몸과 영혼 깊숙이 숨긴다. 문신처럼 새겨진 이 기억의 아픔은 불쑥불쑥 삶 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의 기억 중에 무의식의 기억과 깊은 관계가 있는 ‘암묵기억(Implicit Memory)’이 있다. 자동차 운전을 오래했던 사람이 몇 년을 쉬었다가 다시 운전대를 잡아도 운전을 잘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신체와 감각에 내재된 기억이 작동된 것이다. ‘세월호’의 기억은 ‘집단의 암묵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다 해도 세월호와 관련된 이야기나 노란색 리본만 봐도 가슴은 다시 아플 것이다.
한국교회는 기억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억을 재현하기 위한 공동체이다. 기독교 예배의 핵심 주제는 ‘기억하기’이다. 공동체는 불안과 위협에 휩싸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평화를 경험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몸과 마음 깊은 곳에 무의식적으로 숨겨진 암묵기억을 찾아내고 함께 공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성경은 ‘옛날’을 잘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기억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떠올리게 하고 회개할 수 있는 은혜의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시 25:7)” 모세는 옛날에 대한 기억(신 32:7)을 강조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 15:40)”고 말씀하셨다. 올바른 기억이 참된 회개를 불러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서게 해줌을 일깨워 준다.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에스겔 6:9)”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다.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내면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는 바로 ‘기억이라는 넓은 궁전’이라고 말한다. 기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되살리는 것, 기억 안에 존재하는 생각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기억 안에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 여행하는 것이 우리 삶을 회복시킨다고 했다.
지금 고난 중에 있다면 과거 힘들었던 순간에 함께하셨던 하나님, 삶의 고통 속에서 나를 건져주셨던 그 하나님을 기억하자. 그 기억이 분명 힘이 될 것이다. 100년 동안의 전쟁 중에도 봄은 찾아온다.
▒ 기억에 하나 더
아픈 기억, 세월이 약 아니랍니다
교회가 영적 공동체될 때 치유
“기억은 단순히 머릿속에 그리는 과거에 대한 그림이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감정 개념 태도 행동방식 등 한 인간이 전(全)인격적으로 지니는 경험이다. 우리는 기억으로 인해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에 동반되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기 때문이다.”(데이비드 시맨즈의 ‘기억의 치유’ 중에서)
기독교 상담가 데이비드 시맨즈는 이 책에서 “상처받은 기억이 지닌 진정한 비극은 그 기억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아픔이나 과거의 엄청난 압박이 아니다. 아픔과 압박 때문에 우리가 인간관계와 삶에 잘못된 방법으로 대처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것들이 결국 삶의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경험의 기억들을 치유하기엔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며 특별한 영적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시간이 흐른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10년 20년이 지나도 10분 20분 전에 겪은 고통처럼 생생하다. 마음에 찍힌 한 장의 스냅사진 같다. 포탄 같은 감정적 상처가 마음에 박혔는데 빠지지 않고 옹이 같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신뢰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면 일부러 그 기억을 회상하려 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공감해줄 사람, 신뢰할 만한 상담자가 필요하다.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정태기 총장은 “치유는 믿음과 소망, 사랑이 함께 역사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강하게 일어난다”고 말했다.
교회가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서로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을 치유의 중심에 두는 영적인 공동체가 될 때 기억의 치유가 일어난다. 모두 자신의 아픈 상처를 내어놓고 치유를 받는 공통된 경험을 하기 때문에 그 속에 강렬한 치유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사진=곽경근 이지현 선임기자
[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기억] 상처를 치유로… 기억의 재해석
입력 2018-04-28 00:01 수정 2018-04-28 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