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톺아보기] 제2의 네비우스 선교 정책

입력 2018-04-28 00:01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 교회들은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곧 완수할 것이라고 믿었다. 제국주의적 선교라는 비난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지만 교회사는 당시를 ‘선교의 황금기’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선교의 결실이 컸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H N 알렌과 H G 언더우드 등 10여명의 젊은 선교사를 1884년부터 줄지어 파송했다. 남·북 감리교, 성공회 등도 선교사들을 보냈다. 호주와 캐나다도 동참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많은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혼란이 생겼다. 곳곳에서 갈등이 빚어졌다. 대책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조치를 취한 교단은 미국 북장로회였다. 중국에서 사역하던 존 네비우스 선교사를 1890년 6월 한국으로 급파했다.

네비우스는 1855년 중국에서 사역한 경험을 바탕으로 ‘선교방법론’이라는 논문까지 발표해 선교계의 이목을 끈 노련한 선교사였다. 그는 2주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바람직한 선교정책’에 대해 집중 강의했다. 혈기로 가득 찬 20·30대 선교사들에게 그가 전한 건 ‘토착교회를 키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라는 한국 선교의 3대 원칙을 설파했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 복음화’, 이게 바로 선교역사에 굵은 흔적으로 남아있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뼈대다.

이후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선교는 크게 변한다. 다른 교단도 동참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은 ‘퍼주기 사역’을 지양했다. 토착교회 사역자들은 그 교회의 헌금으로 사례비를 받도록 했다. 학교나 병원 등 건축비가 많이 투입되는 기관을 제외하고 교회를 건축할 때 비용은 자발적인 헌금으로 마련하도록 했다. 이런 원칙은 우리나라 교회가 자립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됐다. 한국교회가 20세기 들어와 급성장한 배경에도 일찌감치 경험한 자립정신이 한몫한 것은 아닐까. 이 같은 정책이 일사불란하게 적용될 수 있었던 건 외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모두 팀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개인행동을 하지 않았고 모두가 선교부의 일원으로 협력했다. ‘질서 있는’ 선교였던 셈이다.

10여년 전 헝가리 데브레첸에서 만난 뵐츠케이 구스타프 헝가리개혁교회 총회장이 한 말이 귓가를 울린다.

“오늘 보고를 받았는데 한 한국인이 부다페스트대학교에서 기타를 치며 찬양한 뒤에 전도지를 나눠줬답니다. 우린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혼자 조용히 와서 그렇게 하나 본데… 우리 교단 역사가 50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도 좀 섭섭하네요. 수백 년 교회 전통을 가진 나라에 와서 우리도 모르게 선교한다는 게 좀 웃기지 않나요.”

500년이나 된 교회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해당 교단과 아무 협의도 없이 노방전도 하는 걸 우회적으로 꼬집은 총회장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질서 있는 선교, 이를 통한 큰 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에 남은 교훈은 과연 뭘까. 이젠 양적인 선교보다 질적인 선교, ‘제2의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선포해 성숙한 해외선교를 할 때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