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후 소용돌이 속에서 평온을 느낄 수 있는 곳은 교회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1월부터는 성탄절 준비로 늘 예배당에 있었다. 어머니는 풍금을 쳤고, 그는 어머니 옆에서 성탄절 성가를 불렀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퇴근 후 간식을 사들고 교회에 왔다. 성탄절 장식을 하고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밟으며 추억의 시간을 만들었다. 삶은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56년 7월 13일. 주은자(73) 권사는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그때 저는 초등학생이었고 아버지는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였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셨는데 7년을 누워계시다 소천하셨어요. 악몽같이 힘든 시간이었죠.”
생활고로 중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이후 복음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했다. 66년 정부에서 파독 간호사 사업을 시작했다. 오빠의 권유로 파독 간호사에 지원했다. 그는 1차 파견 첫해 독일에 왔다. 회한이 몰려오면 씹지 않고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자 뭔지 모를 분노가 회오리쳤다.
“한국 떠나기 전에 제가 어떻게 기도했는지 아세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고생시킨 것, 나한테는 절대 줄 생각도 하지 마세요’라고요. 그 정도로 악바리가 돼 있었어요.”
독일 첼레(Celle)의 종합병원에서 3년을 일하고, 69년에는 베를린 노이쾰른 병원으로 이직했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이를 악물었다. 더 가지면, 더 원하면 잃어버린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월급 중에 50마르크만 생활비로 남겨두고 모두 한국으로 송금했다. 월급날 치킨과 콜라를 먹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막내 여동생을 독일로 초청해 학업의 길을 열어줬다.
주 권사는 72년부터 간호학교를 다녔다. 79년엔 병원 매니지먼트 교육을 받았다. 각종 직업교육을 이수해 83년부터는 수간호사로 근무했다.
병원에서 왕따를 당할 때도 있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신념처럼 다가왔다. 외국인으로서 차별당하지 않으려고 더 강해졌다. 그러자 그를 내쫓으려던 동료들이 오히려 병가를 내는 등 손을 들었다.
“제가 병원에서 별명이 ‘하우스 드라켄’(Haus Drachen, 집 용)이었어요. 독일 간호사들도 무서워할 정도였죠. 한국 사람치고는 체격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차서인지 함부로 하지 못했지요. 사실 두려웠기에 더 강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쓴 건데 말이죠.”
그는 독일인과의 결혼을 통해 잃어버린 행복을 찾고자 했다. 희뿌연 과거의 창문 속 추억의 유년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헛된 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새벽근무를 가야 하는데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기를 혼자 놔두고 갈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믿었던 남편의 외도였다. 게다가 남편은 주 권사 이름으로 몰래 대출을 받아 7만8000마르크라는 거액의 빚을 떠안게 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는 결혼하면 최소 5명의 아이를 낳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자 남편은 “아이는 네 일”이라며 내팽개쳤다. 고독감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주 권사는 ‘내 평생에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난관수술을 했다. 91년 20년의 형식적인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혼생활 동안 상처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이상하게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힘들었던 어린 날이 떠올랐어요. 소박한 일상조차도 제 인생에서는 없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가 고통의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이스마엘의 어미인 하갈의 울음이 들려왔다. 광야에서 하갈이 어린 아들을 안고 포효하던 울음이었다. 그동안 그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성령님이 탄식하며 기도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성처럼 견고했던 자아가 무너졌다. 한인 간호사 친구를 따라 한인교회에 다니면서 회개와 회복이 일어났다. 십자가 앞에 속량 받은 그는 ‘은혜’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그동안 무너졌던 행복과 신분을 되돌리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감사밖에 없어요. 작은 방 한 칸에 홀로 살지만 산 소망이신 주님이 함께하시니까요.”
61살 되던 해, 간호사직을 내려놓고 남을 돕는 일에 팔을 걷었다. 한인 이민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소외 이웃을 도왔다. 마지막을 외롭게 마감하는 한인 이방인을 돕기 위해서였다. 지난해까지 7년간 숙식을 함께하며 친구 어머니를 간병했다.
주 권사는 성경 속 안나와 같이 자신의 여생이 온전히 그리스도만 바라보길 소망한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남편을 만난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이었음을 고백했다. 그의 소원은 하나뿐인 아들이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광야 가운데서 아들을 안고 울부짖고 있다. 그가 오랜 시간 찾았던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거기 있었다.
행복은 유년의 아스라한 풍경 속에도, 질퍽한 고난 속에도 언제나 그분과 함께였다. 돌이켜보니 그에게 고통은, 그분의 능력이 전달되는 행복의 통로였다.
박경란<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
[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4> 주은자 권사
입력 2018-04-28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