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남과 북의 지도자가 다시 만난다. 과거 두 정권의 극단적 대결정책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인데, 정치권은 첨예하게 양분돼 있다. 덩달아 국민의 의견도 분분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성향과 선택은 국민의 기본권에 해당한다.
특히 남북관계 같은 첨예한 문제를 놓고 소위 매파와 비둘기파로 의견이 갈리는 걸 탓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교회마저 진영 논리에 빠져 자신과 다른 의견을 색깔론으로 매도하는 이상한 현실이 문제다.
교회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그래야 맞다. 왕이 잘못하면 왕을 책망하고 (그 경우 좌파 또는 빨갱이라는 색깔을 칠한다), 백성이 잘못하면 백성을 꾸짖어야 (그 경우 우파 내지는 어용이란 공격을 받는다) 선지자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 빌붙어 “괜찮다, 평안하다”고 타협하는 자를 구약 성경은 거짓 선지자로 규정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근거해 진리를 선포하다가 양쪽에서 돌을 맞았다.
우리가 공산 정권을 반대하는 것은 교회가 자본주의 편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인권을 유린하고 일당 독재의 전횡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적 폭력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교회는 자본주의의 잘못도 통렬히 비판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반대편에 섰다고 진리로 포장돼선 안 되고, 교회의 가르침이 ‘반공 복음’으로 둔갑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어느 편과도 야합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에 근거해 ‘예’와 ‘아니오’를 공정하게 말해야 한다.
교회는 남북 지도자의 만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구원의 본질은 원수가 된 관계의 회복인데, ‘화해의 복음’ 관점에서 환영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악의 축’ 북한은 망해야 하고, ‘예수 잘 믿는’ 남한은 흥해야 하는가. 우리가 아직 죄인이고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았던가.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이 각각 하나님께 자기 편 들어달라고 기도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하나님은 남한 편이신가. 니느웨의 멸망을 바랐던 요나의 오류를 한국교회가 답습하는 건 아닐까. 특정집단을 편애하는 지역의 영(靈) 정도로 하나님을 폄하하는 게 옳은 일인가.
이스라엘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온 세상과 열방을 축복하기 원하셨고, 그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빗나간 선민사상으로 자신들을 배타적 특혜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다. 2000년 기독교 역사는 교회가 다양한 형태로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대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한국이 예수 잘 믿어서 잘 살게 되었다는 식이다. 예수 잘 믿는 대한민국을 배타적으로 축복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할이라 우기는 꼴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빗나간 헤브라이즘을 질타하셨다. 제자들의 관심은 온통 ‘이스라엘 나라’에 있었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 정치경제적 메시아가 될 것을 기대하고 주문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모든 초점을 맞추셨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하신 복음은 ‘천국(하나님 나라) 복음’이었고, 부활 후 40일간 세상에 머무시며 오로지 하나님 나라만 가르치셨다. 실망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게 그리 놀랍지 않다. 유다의 관점에서는 되레 예수님이 그를 배신하신 건지 모른다.
애국심이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백두대간에 거하는 산신령으로 끌어내리는 신성모독을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남한과 북한 중 하나를 택하셔야 하는 분이 아니고 한반도와 온 세상을 그분의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셔야 마땅한 만유의 주재이시다. 인간의 나라는 유한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정민영(전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
[시온의 소리] 하나님 나라 임하소서
입력 2018-04-27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