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념에 밀려 조국 등졌지만 평화·통일 갈망했던 신념의 삶
1958년 프랑스 정착이 전환점 수묵화 벗어나 문자추상화가 변신
광주항쟁이 ‘군상’ 창안 결정적 계기… 연작에 자유·평화 향한 열망 담아 미공개 연작 40여점 등 80점 선봬
덩실덩실∼. 넘쳐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춤춘다. 일필휘지 동양의 붓끝에서 태어난 인물 군상이다. 환희가 넘치는 힘찬 동세. 마치 해방의 그날 광화문광장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던 그날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이다.
무얼 그린 걸까. ‘반핵 반전 반독재 인류평화 소망 무도장(舞蹈場)’. 작가의 사인 옆, 제목처럼 쓴 글귀가 먹먹하다. 좌우 대립 이데올로기에 희생됐던 삶, 그럼에도 한결 같이 통일과 평화를 소망했던 타국에서의 삶이 주는 감동 탓이다.
수묵 추상화가 고암 이응노(1904∼1989)의 도불 60주년 기념 개인전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거대한 군중이다. 붓끝에서 나온 군중들이 무언의 화폭에 내지르는 함성과 신명이다.
전시 제목은 ‘군상-통일무’. 누구도 예상 못했던 요즘의 남북 간 해빙무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전시다. 그림 속 군중들이 광장에 나와 지금의 정세를 축하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가나아트센터가 마련한 이번 전시는 고암의 60년 화업 세계의 마지막 단계인 1981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군상 연작에 포커스를 맞춘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은 1922년 서화계 대가인 김규진의 문하에서 문인화와 서예를 배웠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묵죽화로 여러 차례 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으나 서화의 고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1935년 일본으로 유학 간다. 이후 동양화이면서도 사실주의 풍경화로 바뀌던 화풍은 해방을 전후해 서구적 모더니즘을 수용한 반추상 양식의 풍속화로 바뀌었다.
도불은 큰 전기가 됐다. 54세이던 1958년, 동양화가인 아내 박인경과 함께 독일을 거쳐 프랑스의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수묵화의 한계를 과감히 벗어던졌다. 프랑스 화단에서 유행했던 표현주의적 추상인 앵포르멜에 영감을 받았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문자추상화가 탄생했다.
고암의 인생은 남북 분단의 아픔이 관통한다. 독일로 건너갔던 고암은 6·25 전쟁 때 월북한 아들 관계로 베를린에서 북한 공작원과 만나게 됐는데, 그것이 반공법에 위반돼 1967년 서울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1969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 파리로 돌아갔다가 또 곤욕을 치렀다. 1977년 파리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의 북한 납치 미수 사건의 배후로 몰렸던 것이다.
전시에는 그가 창작욕을 어쩌지 못하고 옥중에서 휴지를 뭉쳐 만든 종이 찰흙 조각 2점이 나왔다. 그것도 춤추는 형상이어서 80년대의 군상 시기를 예고한다.
고암은 1983년 프랑스에 귀화했지만 마음은 고국을 맴돌았다. 군상 시리즈가 그 증거이다. “군상을 창안한 것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이번 전시를 주관한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은 전한다. 당시 한국에서는 모든 정보가 차단됐지만 유럽에 생생히 전해진 광주사건의 비극은 그에게 비수가 돼 박혔다. 그는 군상 연작 속 춤추는 인간을 통해 자유와 평화를 향한 열망을 담아냈던 것이다.
군상 연작은 문자 추상의 진화임을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자의 획은 길게 뻗어 나오더니 팔과 다리가 되고, 휘몰아치더니 춤이 되었다. 그래서 군상 시리즈는 마치 70, 80년대 독재정권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던 민중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대학가 시위 때 축제처럼 추던 기차춤 같은 동작도 있다. 이번 전시에는 미공개작 ‘군상’ 시리즈 40여점을 포함해 80점이 나왔다. 전시는 5월 7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남북해빙 예견한 듯 일필휘지… 故이응노 화백 ‘통일무’ 전시회
입력 2018-04-26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