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묶인 건 미국 대통령도, 러시아 대통령도 아니다. 러시아와 서방의 신냉전 기류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러시아인들을 좌절시키고 있다. 연초까지만 해도 미국 관광비자를 받는 데 1주일이면 충분했지만 지금은 기약이 없다. 모스크바 시민 모하메드 토르키(32)는 “피해를 보는 건 권력자들이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토르키는 올여름 미국으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야경을 감상하고 텍사스에서 스테이크를 먹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영국에서 발생한 전 러시아 스파이 암살 사건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또다시 외교 전쟁을 벌이면서 유학, 여행, 취업을 목적으로 미국에 가려던 러시아인들이 꿈을 접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가 미국 외교관 60명을 추방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미국 영사관이 문을 닫자 비자 발급이 어려워진 탓이다.
러시아 정부는 미국 비자 발급에 8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안내했다. 예술인이나 항공사 직원도 예외가 없다. 러시아 항공사 아에로플로트 승무원한테도 미국 비자는 발급되지 않았고, 볼쇼이 극단의 유명 발레리나 2명도 뉴욕 공연을 위한 비자를 거절당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미국이 비자 장벽을 만들고 있다. 냉전시대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비난했다.
신냉전 때문에 결혼식 계획이 틀어진 청년 블라디슬라프 코발레프(27)는 분노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작은 결혼 파티를 여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코발레프는 “LA는 우리에게 낭만 그 자체예요. 러시아에서 하는 결혼, 그것만큼 따분한 건 없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크렘린궁은 이런 상황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러시아인들이 서방의 소프트파워(사상·문화·예술·정보 등이 행사하는 영향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줄어서다. 러시아 정부는 서방의 ‘불친절한 국가들’에서 공부하는 국민들에게 “고국으로 돌아와 해외에서 받은 교육을 전수하라”고 말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애국주의를 한껏 고취시키며 국내 휴가를 독려하고 있지만, 젊은 러시아인들은 서방에서 확산되는 반(反)러시아 분위기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임세정 기자
미·러 갈등에 발 묶인 러시아인들
입력 2018-04-23 1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