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억원대 재력가 장손 조부 술 취하게 한 후 부동산 서류에 지문 찍어
송씨 남편이 고소하자 후배에게 살해 지시하고 단독범행으로 자수 시켜
檢 물증에 범인, 사주 실토
배우 송선미씨의 남편 고모씨 청부살해 사건은 돈에서 비롯돼 돈으로 끝난 비극이었다. 곽모(40)씨는 재력가인 조부의 국내 재산을 독차지하려 가짜 서류로 소유권을 이전하고 걸림돌이 되던 사촌 형 고씨를 청부살해했다. 고씨와 곽씨는 재산 문제로 틀어지기 전까지 어울려 다니며 사업도 같이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곽씨는 마지막까지 완강히 혐의를 부인했지만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판단하고 지난 11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 관계를 토대로 사건의 전말을 정리했다.
조부의 재산을 탐하다
1918년생인 조부 곽모씨는 10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인삼, 철물 사업을 통해 기반을 닦은 뒤 교토와 오사카에서 호텔, 빠찡코 등의 사업을 해 수천억원대 자산을 모았다. 국내에만 600억원대 부동산을 갖고 있었고 한국과 일본에 3명의 부인, 12명의 자녀를 뒀다. 통상 매달 한 번씩 입국해 일주일 정도 머물다 돌아갔는데 외손자 고씨가 살해된 뒤 기력이 급격히 쇠해져 지난해 12월 사망했다.
피고인 곽씨는 그의 장손이다. 곽씨와 곽씨 부친(73)은 2016년 일본에 있는 다른 자손이 호텔과 빠찡코 지분 51%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 재산이라도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곽씨는 먼 인척인 법무사 김모(64)씨를 동원해 조부의 국내 부동산 현황부터 파악했다.
재산 빼돌리기는 치밀하게 진행됐다. 곽씨는 부친과 함께 그해 8월 한국에 온 조부의 저택으로 찾아가 새벽까지 와인을 잔뜩 마시게 했다. 미리 준비해 간 부동산 소유권 이전에 필요한 서류에 술에 취한 조부의 오른손 지문을 찍었다. 이튿날에는 법무사 김씨를 불러 조부와 면담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조부가 곽씨에게 국내 전 재산을 증여한다는 내용을 법무사가 확인하는 장면처럼 연출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김씨가 의사 행세를 하면서 막 잠에서 깬 조부의 맥을 짚고 건강 상태에 관한 얘기를 나눴을 뿐이었다. 곽씨는 이후 집안 금고에서 조부의 인감도장을 몰래 꺼내 나왔다.
이들은 대전 임야 1만8000여㎡, 경기도 용인 땅 5만7000여㎡ 등의 소유권을 차례로 곽씨 앞으로 돌렸다. 그는 조부의 은행계좌에 있던 3억여원도 이체해 취·등록세 납부 등 부동산 이전 비용으로 사용했다.
‘걸림돌인 사촌형을 죽여달라’
2016년 12월 일본으로 찾아온 다른 자녀들에게 곽씨의 소행을 들은 조부는 진노했다. 그는 외손자 고씨와 함께 곽씨 부자를 경찰에 고소하고 소유권이전등기말소 청구소송도 냈다. 고씨는 곽씨가 조부를 만나지 못하게 차단하는 역할도 했다.
곽씨는 부하처럼 데리고 있던 조모(28)씨에게 고씨의 동태를 감시하도록 시켰다. 곽씨와 조씨는 일본의 한 어학원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으며 지난해 5월부터 범행 발생 직전까지 한 오피스텔에서 동거했다. 곽씨는 조씨에게 월 한도 330만원의 신용카드를 줘서 쓰도록 했다.
같은 해 7월 사문서위조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풀려난 뒤 고씨를 향한 곽씨의 악감정은 극에 달했다. 그는 조씨에게 “고씨를 죽여야겠다. 네가 해주면 현금 20억원을 주겠다. 가족 생계도 책임지겠다”고 한 것으로 판결문에 나와 있다.
조씨는 8월 17일 소송 관련 정보를 넘기겠다며 고씨에게 접근했다. 실제 이틀 뒤 자료가 담긴 이동식저장장치(USB)를 고씨에게 건네고 1000만원을 받았다. 두 사람은 서울 서초구 한 법무법인에서 21일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약속한 날 오전 11시40분쯤 조씨는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고씨와 얘기를 나누던 중 벌떡 일어나 쇼핑백에 넣어왔던 흉기로 고씨의 목 부위를 찔렀다.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죽이라”는 곽씨의 사전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드러나는 청부살해
조씨는 도주하지 않고 범행 장소에 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정보를 줬는데도 약속했던 큰돈을 주지 않아 홧김에 죽였다”고 진술했다. 경찰도 일단 우발적인 단독 범행으로 판단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했다. 그런데 압수물 분석 과정에서 살인교사의 정황들이 발견됐다. 곽씨가 범행 당일 밤 스마트폰으로 ‘살인교사’ ‘살인교사죄 형량’ 등을 검색한 기록도 나왔다.
주임검사인 형사3부 박경섭 검사는 조씨를 상대로 배후를 추궁했다. 단독 범행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던 조씨는 9월 25일 곽씨가 600억원대 재산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된 것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를 봐줘야 할 이가 구속되고 살해의 대가도 받기 어려운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검찰이 거듭 정황 증거들을 들이밀자 곽씨가 살인을 사주했다고 실토했다.
곽씨는 6개월간의 재판 과정에서 사기부터 살인교사까지 혐의 전체를 부인했다. 재산은 조부로부터 정상적으로 물려받았으며 살인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조의연)는 “피고인의 범행은 패륜적 성격과 살해 방법의 계획성, 잔혹성 등에서 관용을 베풀기 어려운 범죄”라며 “곽씨를 사회로부터 무기한 격리한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산 빼돌리기에 가담한 부친과 법무사 김씨에게는 각각 징역 3년,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살해범 조씨는 지난달 16일 징역 22년을 선고받았다.
지호일 이가현 기자 blue51@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판결인사이드] 조부 재산 탐내 친했던 사촌을… 송선미 남편 청부살해 전말
입력 2018-04-16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