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피해자 상황 고려해야” 성희롱 판단 기준 첫 제시

입력 2018-04-14 05:02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돼 가해자 중심 구조도 고려를”
사건 발생 맥락서 파악해야… 피해자 인권보장 기여 기대


대법원이 성희롱 소송의 판단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사건을 심리하는 법원은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토대로 피해자가 놓인 특수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대법원은 강조했다.

대법원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여학생들을 성희롱해 해임된 지방의 한 대학교수 A씨가 “해임을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에 A씨 손을 들어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A씨는 수업 중 여학생을 뒤에서 안았고, 학과 엠티(MT)에서 자는 여학생의 볼에 입을 맞춘 것으로 조사됐다. “뽀뽀해주면 추천서를 써주겠다” “남자친구랑 만나지 말고 나랑 만나자” 등 부적절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15년 4월 해임되자 그는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심사를 청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송을 냈다.

1심은 학교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단했으나 2심 재판부는 이를 뒤집었다. A씨의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거나, 피해자들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수업 공간에서 여학생을 뒤에서 안는 행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며 “피해자 손 위로 마우스를 잡거나 어깨동무를 한 행위는 적극적인 교수방법”이라고 했다. 또 성희롱 성격의 발언도 “학생들과 친한 관계를 유지한 점 등을 보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줬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한 피해 학생의 진술에 대해서는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사실은 말하지 않고, 다른 학생의 피해사실은 자유롭게 진술하고 있다”며 “이것이 성희롱 피해자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고 했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면서 성희롱 사건 심리 시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 등에 대한 판단 기준을 자세히 밝혔다.

먼저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구시대적인 고정관념이나 가부장적 인식에서 벗어나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배려하는 성 관념이다. 또 성희롱 사실이 알려지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노출될 수 있는 2차 피해 가능성을 유념해야 하며,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성희롱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성희롱 여부를 판단할 때는 우리 사회 전체의 일반적 사람이 아니라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 사람의 입장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가해자와 피해자는 교수와 학생의 관계였고 성희롱이 교수연구실이나 강의실에서 이뤄졌다”며 “취업에 중요한 추천서 등을 빌미로 성적 발언을 하기도 한 점, 이런 행위가 수차례 반복된 점 등 여러 정황을 고려했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희롱 소송의 심리와 증거 판단의 법리를 제시한 최초의 판결”이라며 “앞으로 성희롱 관련 사건에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